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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앤셜리 ≪
예전부터 읽어야겠다고 리스트에만 올려두었던 책인데,
마침 독서동호회에서 누군가 추천을 했다.
나무와 관련된 시들을 모아놓은 책인데,
시도 괜찮지만, 저자가 적은 에세이 형태의 글들이
더 맘에 와 닿는다.
아...이 책을 읽으니, 숲해설사 공부가 더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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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o
나무가 말하였네
강은교
나무가 말하였네
나의 이 껍질은 빗방울이 앉게 하기 위해서
나의 이 껍질은 햇빛이 찾아오게 하기 위해서
나의 이 껍질은 구름이 앉게 하기 위해서
나의 이 껍질은 안개의 휘젓는 팔에
어쩌다 닿기 위해서
나의 이 껍질은 당신이 기대게 하기 위해서
당신 옆 하늘의
푸르고 늘씬한 허리를 위해서.
16p
나무1-지리산에서
신경림
나무를 길러본 사람만이 안다
반듯하게 잘 자란 나무는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 잘나고 큰 나무는
제 치레하느라 오히려
좋은 열매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
한 군데쯤 부러졌거나 가지를 친 나무에
또는 못나고 볼품없이 자란 나무에
보다 실하고
단단한 열매가 맺힌다는 것을
나무를 길러본 사람만이 안다
우쭐대며 웃자란 나무는
이웃 나무가 자라는 것을 가로막는다는 것을
햇빛과 바람을 독차지해서
동무 나무가 꽃 피고 열매 맺는 것을
훼방한다는 것을
그래서 뽑거나
베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사람이 사는 일이 어찌 꼭 이와 같을까만
18p
경북 영주 소수서원 솔숲
42p
민지의 꽃
정희성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 기슭
덜렁 집 한채 짓고 살러 들어간 제자를 찾아갔다
거기서 만들고 거기서 키웠다는
다섯살 배기 딸 민지
민지가 아침 일찍 눈 비비고 일어나
저보다 큰 물뿌리개를 나한테 들리고
질경이 나싱개 토끼풀 억새...
이런 풀들에게 물을 주며
잘 잤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게 뭔데 거기다 물을 주니?
꽃이야, 하고 민지가 대답했다
그건 잡초야, 라고 말하려던 내 입이 다물어졌다
내 말은 때가 묻어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지 못하는데
꽃이야, 하는 그 애의 말 한마디가
풀잎의 풋풋한 잠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
55p
오월 소식
어느 봄날 이른 아침, 안타까운 마음에 나무 앞에서 넋을 빼고 서 있으려니, 나무 앞에서 한창 논을 갈던 농부 한 분이 연유를 묻는다. "꽃잎 떨어진 게 아쉬워 그런다" 하자, 선뜻 자신의 전화번호를 적어준다. "내년부터는 내가 이 나무의 오월 소식을 전해줄테니, 전화 받고 오라" 한다.
그 뒤, 다른 나무들의 안부처럼 챙기지 않아도 순천 이팝나무는 해마다 오월 소식을 전해온다. 바람에 실려 나무에 건네준 오월 소식을 남도의 한 농부는 꼬박꼬박 내게 전해준다. 그이가 전해주는 따뜻한 오월 소식 덕에 내 봄나들이는 언제나 향그럽다. 순천 아닌 어디여도 편안하기만 하다.
59p
경남 남해 물건리 방조어부림
처음 이 숲을 찾았던 건 봄이었다. 긴 숲 곳곳에 이팝나무가 꽃을 활짝 피우던 때였다. 가로로 길게 뻗은 나무들의 행렬. 고개를 넘으며 언덕 마루에 서서 내려다보는 바닷가 어부림의 장관은 발길을 멈추게 했다. 언덕 위에서 한참을 내려다본 숲의 장관은 다른 어느 숲에서도 느낄 수 없는 감흥이었다.
63p
감나무
흔하고 편한 탓일까. 감나무는 있어도 있는 줄을 잘 모른다. 그저 감 열릴 즈음이나 되어야 맛난 감을 따려고 동네 조무래기들이 웅기중기 매달리는 게 전부일 뿐이다.
평소라면 존재감조차 느끼기 힘든 그 나무의 진정한 존재감은 그러나 나무가 없어진 뒤에 절실히 느껴진다. 썩어 병들었거나, 장독대를 넓히기 위해 베어내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나무가 없어졌을 때다. 얄궂게도 너무 늦게 다가오는 존재감이다. 여느 집이나 한 그루씩 있는 나무가 우리 집에 없다는 허전함은 감나무의 빈자리를 절실히 느끼게 한다.
몇 날 며칠 동안 아무 이야기하지 않고도 편안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다. 옆에 있지만, 침묵이 불편하지 않고, 그저 함꼐 있는 것만으로, 혹은 바라볼 수만 있어도 행복한 그런 사람 말이다. 그런 사랑하는 사람이 곁을 떠났을 때, 그때 그의 빈자리는 견디기 힘들 만큼 커다랗게 느껴진다. 감나무가 그렇다.
사는 동안, 감나무처럼 누구에게라도 부담을 주는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편안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그러나 그대로 잊히지만은 않았으면 정말 더 좋겠다.
76-77p
버드나무
삶의 무게가 버거워질 무렵이면, 불현듯 떠나온 고향 마을이 기억날 것이다. 왜 고향은 세상에 부대껴 삶이 힘겨울 때에만 떠오르는 건가. 그때에는 무엇보다 먼저 마을 어귀에 서 있던 버드나무 한 그루, 사람보다 먼저 떠오를 게다.
92p
미루나무
미루나무 같은 여자가 있다. 꼬장꼬장해 보여 언제나 곧추 서있는 듯한 여자. 그러나 생김새와는 달리 조금은 바보 같은 웃음과 어리숙한 표정이 정겨운 여자. 시들시들하기도 하고, 때로는 멍청한 웃음으로 사람들을 편안하게도 한다. 그래서 그이는 더 미루나무를 닮았다.
그이가 미루나무를 닮은 건, 아마 퍼내도 마르지 않는 깊은 사랑의 샘을 간직한 때문이다. 그이가 마침 내게 "나는 무슨 무슨 나무 같아요?"라고 물었다. "햇빛과 바람 강물처럼 감기는 미루나무 같다"고 말했으면 바보처럼 더 좋아했을 텐데. 그냥 "미루나무"라고만 말했다.
99p
나무 소리
봄 숲에 아이들이 모여든다. 아이들을 이끄는 선생님의 손에는 청진기가 들렸다. 선생님이 아이들을 큰 나무 앞에 세우고 차례대로 청진기를 건네준다. 아이들은 의사처럼 조금은 도도한 태도로 청진기를 귀에 꽂고 나무줄기에 다가선다. 짐짓 수술방에 들어선 의사처럼 심각한 표정을 짓던 아이는 금세 눈망울을 화들짝 키웠다가 '우와!' 하고는 활짝 웃어버린다.
나무의 약동 소리를 들은 게다. 봄이면 왕성해지는 나무의 수액 빨아올리는 소리가 아이의 귓속 세반고리관을 지나 가슴까지 전해진 거다. 이제 아이들도 알겠따. 나무가 사람처럼 활기차게 호흡하고 또 왕성한 식욕으로 뿌리에서 저 높은 곳의 가는 가지 끝 잎사귀까지 물을 끌어올린다는 걸.
135p
봉화 청량산 응진전 가는 길목의 고사목
150p
탱자나무
전북 익산 이병기 생가의 모정 앞에 관상수로 심은 탱자나무는 잊히지 않는 멋진 나무다. 모정에는 '승운정勝雲亭'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나무는 여느 탱자나무와 달리 하나의 줄기가 곧게 뻗어 오른 뒤, 사람 키 높이쯤에서 여섯으로 가지를 나누면서 둥글게 펼쳤다. 잘 다듬어낸 공 같다. 정자 이름 승운처럼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는 애드벌룬 같기도 하다. 5m 조금 넘게 자란 이 나무는 아마도 우리나라의 모든 탱자나무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나무 아닌가 싶다. 한참을 들여다보면, 이 나무를 바라보며 나무처럼 꼿꼿하게 일생을 살아갔던 시대의 지사 가람 이병기 선생의 어린 시절이 꿈결처럼 어슴프레 나타났다. 사라진다. 이 집 탱자나무처럼 거침없이 살아낸 선생의 삶이 그려진다.
162p
산수유나무
몇 해 전 경북 봉화의 산수유마을에서 겨우내 빨갛게 익은 열매가 가지에 그대로 매달려 있는 걸 봤다. 값이 꽤 많이 나가는 귀한 열매이지만, 열매를 따고 씨를 발라내는 일을 할 사람이 없어서란다. 산마을 붉은 산수유 열매가 그렇게 사람의 관심을 벗어나 가지에 매달린 채 겨울을 난다. 그래도 나무는 다시 봄이 오면 어김없이 샛노란 꽃을 피우겠지.
옷깃을 스미는 바람에 한기가 사라지지 않을 즈음부터 샛노란 꽃을 안개처럼 피워내는 산수유나무. 이 나무에 꽃이 피면 봄나들이 채비를 할 때다. 잿빛 동토에 안개꽃처럼 아른아른 피어나는 산수유나무 꽃은 어찌 이리도 화려할까. 아마 겨울을 깨우는 처음 색인 까닭일 게다.
177p
동백나무
동백의 낙화에 온 우주의 숨결이 일순 멎는다. 지고至高 신비의 순간이다. 전남 강진 백련사 동백 숲 늙은 동백나무의 낙화는 참으로 그렇다.
동백의 낙화는 그 숲 안에 고요히 들어서서 느껴야 한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으면, 후드득 새빨간 통꽃이 떨어지는 순간을 듣게 된다. 숨이 멎는 찰나, 고요의 동백 숲에는 창졸간에 비장함이 흐른다.
...
산기슭 걸어 오르면, 다산 선생의 유배 생활 터였던 '다산초당' 이 있다. 유배 생활 중에 선생도 이 숲에 자주 들렀을 게다. 멀리로 강진 앞바다가 훤히 내다보이는 곳. 강진 백련사 동백 숲은 그렇게 삶들을 오래도록 품어 안았다. 서로의 무명을 들여다보며 고요히 천하의 숲으로 남았다.
195p
나무처럼
오세영
나무가 나무끼리 어울려 살듯
우리도 그렇게
살 일이다.
가지와 가지가 손목을 잡고
긴 추위를 견디어 내듯
나무가 맑은 하늘을 우러러 살듯
우리도 그렇게
살 일이다.
잎과 잎들이 가슴을 열고
고운 햇살을 받아 안듯
나무가 비바람 속에서 크듯
우리도 그렇게
클 일이다.
대지에 깊숙이 내린 뿌리로
사나운 태풍 앞에 당당히 서듯
나무가 스스로 철을 분별할 줄을 알듯
우리도 그렇게
살 일이다
꽃과 잎이 피고 질 때를
그 스스로 물러설 때는 알 듯
220-22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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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말하였네
고규홍 저 | 마음산책 | 2008년 0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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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mber: 342/48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