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쿼크, 카오스 그리고 기독교 : 과학과 종교에 관한 질문들 - 존 폴킹혼
≫ 글쓴이 : 앤셜리 ≪

켐브리지 대학 물리학자 교수가 쓴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이다.

예전에 철학자가 설명하는 기독교 책을 읽어본 적이 있었다.
그건 너무 난해해서 힘들었는데~ 과학자가 쓴 기독교 책은 공대생인 내게 참 잘 와닿는 것 같다.
그래서 최근에 과학자들이 쓴 기독교 책을 이것저것 읽어보고 있다.
과학을 좋아하는 크리스찬들이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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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o

비록 지도가 어느 지역에 대한 모든 진리는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진리를 담고 있지 않는다면, 그 지도는 유용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내가 과학에 대해 믿는 바이다. ... 과학은 물리적 세계에 대한 지도를 제공하며, 그것은 모든 목적은 아니더라도 어떤 목적을 이루는데 매우 신뢰할 만하다.
26p

19세기에, 물리학에서 가장 찬란하다고 할 만한 발견을 통해 제임스 클라크 맥스웰은 빛이 전자기 에너지의 파동임을 밝혀냈다. 빛에 대한 질문은 가장 결정적이고 만족스런 방식으로 해결되었다. 하지만 20세기 초반에 막스 플랑크와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빛은 어떤 상황에서는 파동이 아니라 입자처럼 행동한다는 걸 밝혀냈을 때, 사람들이 얼마나 경악하고 거북해했을지를 상상해 보라.
... 우리가 물리적 세계를 꽤나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도 물리적 세계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를 놀라게 할 일들이 아직 남아있다는 것이다.
28p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 (The Way the World is, 1992)
한 꺼풀 벗겨보면 과학과 종교가 지적 사촌지간이라고 나는 믿는다. 둘 다 근거 있는 믿음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어느 한쪽도 절대적으로 확실한 지식을 주장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각각의 결론은 해석과 경험의 상호작용에 바탕을 두기 때문이다. 그 결과 과학과 종교는 수정될 가능성에 열려 있어야 한다.
32p

과학만으로는 대책 없이 제한되고 빈약한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과학적 시각에서 음악은 그저 공기의 진동에 지나지 않게 된다. 아름다운 그림도 화학물질 조각들의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과학적 탐구의 기술 자체는 가치에 대한 질문들을 배제한다. 그렇다고 해서 가치가 존재하지 않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결코 아니다. 인새을 살만한 가치가 있게 해 주는 거의 대부분의 것들은 과학이라는 그물의 넓은 구멍들로 다 빠져나간다. 믿지 않는 친구들과의 편안한 토론에서 나는 항상 과학적 시각의 제한된 수평선 위로 눈을 돌리도록 그들을 격려한다.
...
신에 대한 믿음이 갖는 장점 중 하나는 그 믿음이 우리 인간이 경험하는 세계의 매우 다양한 면들을 엮어낼 수 있다는 데 있다. 물리적 우주의 아름다운 구조 앞에서 느끼는 경이로움은 과학자들이 갖는 아주 기본적인 경험이며, 과학 연구에 관련된 모든 지루한 노동들에 대한 대가인데, 그 경이로움은 창조주의 지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름다움을 경험하는 것은 신의 창조의 기쁨을 나누는 것이다. 우리의 도덕적 직관들은 선하고 완전한 신의 뜻을 암시한다. 무신론자들이 어리석다는 뜻이 아니라 단지 유신론이 더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으며, 지적으로 더 만족스럽다는 뜻이다.
34p




근대과학의 선구자들 대부분이 종교적인 사람들이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들은 (갈릴레오처럼) 교회와의 관계에서 문제를 겪었거나, 혹은 (뉴턴처럼) 비정통적인 지성을 가졌을 지는 몰라도 종교는 그들에게 중요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성경이라는 책과 자연이라는 책, 두 권을 우리에게 써주셨다고 말하기를 좋아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두 가지 책 모두를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40-41p




그들은 그 공명을 찾아냈다. 그것은 빛나는 과학의 성공이었다. 하지만 호일에게는 그 이상이었다. 만일 물리법칙이 조금만 달랐더라면 고명이 다른 에너지에서 일어났을 것이고, 그렇다면 탄소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며, 탄소를 기반으로 하는 생명체나 아울러 그것을 걱정해야 할 천체물리학자들도 존재하지 못했을 것임을 그는 깨달았다. 그때 평생 동안 무신론에 기울어져 있었던호일은 강한 요크셔 사투리로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우주는 만들어진 작품이다." 그렇게 두드러진 자연법칙의 미세 조절을 통해서 그토록 괄목할 만한 생산성이 가능해졌는데, 그것을 단지 행복한 우연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신'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았던 호일은 이 모든 것의 배경에는 어떤 우주적 지성이 조재할 거라고 말했다.
54p




생명체를 위한 기본 재료들을 만드는 일이 쉽지 않다는 점은 이해했을 것이다. 그것은 매우 특별한 우주에서만 가능하다. 나는 이러한 '미세조절'이 반드시 필요한 예들을 더 제시할 수도 있다.
56p

존 레슬리 John Leslie <우주들> (Universes, 1989)

생물 진화의 이야기는 더욱 친숙하다. 유전자의 돌연변이는 우연이다. 그것은 그저 가끔씩 발생한다. 그래서 새로운 형태의 생명체가 발생하고, 그것은 질서정연한 환경 안에서 자연 선택에 의해서 걸러지고 보존된다. 만일 유전자 정보가 아무런 변화 없이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이된다면, 새로운 것이 생길 수 없다. 반면에 유전자 정보가 충분히 잘 전달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영속될 수없다. 이처럼 비옥한 우주가 되려면, 너무 완고해서도 안 되고 너무 느슨해서도 안 된다. 그것은 우연과 필연을 둘 다 필요로 한다. 우리는 진정하나 새로움 novelty이 '혼돈의 가장 자리'에서 발현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연은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엔진이다. 필연은 풍성함을 유지킨다. 그처럼 간단하다. 그러나 우연의 역할은 우주의 역사가 신의 목적을 드러낸다는 신학적 주장을 부인하는 것이 아닌가? 특히 생물학자들은 그런 식으로 이 문제를 보아왔다. 그들은 물리학자들에 비해 우주 역사의 미세하게 조절된 규칙들에 대해서 별로 감명 받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
신이 세상을 창조하려고 했을 때 딜레마에 부딪쳤다고 하느느 조심스럽게 제안하고 싶다. 신은 성실한 분이고, 성실한 신의 당연한 특성은 창조세계를 안정되게 관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안정성 그 자체는 단순한 완고함으로 굳어져서 전혀 새로운 일이 일어날 수 없는 시계와 같은 우주로 귀결될 수 있다. 신은 또한 인지하다. 그리고 인지한 신의 당연한 특성은 창조세계에 독립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부모로서 우리는 이것을 잘 알고 있다. 아이들이 교통이 복잡한 위험한 세상으로 혼자서 자전거를 타고 가도록 허락해 주어야 하는 때가 온다. 그렇게 허가해 줄 수 있는 부모의 능력은 아이의 성장과정에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독립성 그 자체는 마음 내키는 대로 해도 된다는 허가증으로 퇴보되어 무질서한 혼돈의 우주로 귀결될 수 있다.

나는 인자하고 동시에 성시한 신은 독립성과 안정성이라는 한 쌍의 능력을 창조세계에 주었다고 믿는다. 이런 생각은 우주의 진화 역사에 우연과 필연이 풍성하게 상호작용한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이런 설명을 통해 우연이 훨씬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모노드와 도킨스는 우연이라는 말 앞에 '눈 먼' 이라는 형용사를 붙여서 무목적성과 무의미성을 연상시키려고 한다.그러나 그들의 편향적인 단어 선택에 우리가 속으르 필요는 없다. 물리적 세계가 인류를 탄생시키기 위해 부여받은 풍성함을 탐험하고 실현해내는 하나의 방법이 우연을 섞어서 사용하는 것이다. 생화학자이면서 성공회신부인 아서 피콕은 <창조와 과학의 세계> (1979)에서 우연을 '모든 가능한 탐색 대상들을 훑고 지나가는 신의 레이더 탐지기' 라고 기술했다.
68-71p

나는 신이 우주의 역사와 섭리적으로 상호작용한다고 믿는다. 다른 말로 하면, 창조는 뭔가 완성된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연속적인 과정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신은 140억 년 전의 창조주엿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창조주이기도 하다.
연속적인 창조는 그 과정 안에 창조물들의 자유를 허락한다. 그 결과, 역사가 진행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것들이 '우연' 에 의해서 생겨난다.
...
우주는 창조주에 의해서 인도되는 풍성함으르 부여받았다. 그러나 또한 그 자신의 독특한 방식에 따라 그 풍성함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허락받았다. 우연은 눈 먼 무목적성의 성징이 아니라 자유의 상징이다.
이런 특징을 갖는 우주는 극단적인 면을 갖는 우주일 수밖에 없다. 우연이 섞여서 사용되다보면, 퇴보에 이를 수도 있고 풍성한 새로움에 이를 수도 있다. 막다른 골목에 이를 수도 있고 지름길에 이를 수도 있다. 여기서 우리는 긴 우주의 역사 동안 남겨졌던 물음표를 만나게 된다. 그것은 물론 악과 고통의 문제다. 이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는 별로 언급할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 중 누구도 그 당황스런 본질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도움이 안되는 불운 대문에 삶이 손상되거나 단축된 사람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암과 강제수용소들이 존재하는 세상이 정말로 능력 있고 인자한 신의 창조물로 보이는가? 때문에 사람들이 신에 대한 믿음에 도달하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어려움이 바로 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믿음을 가진 우리들은 인간의 쓰라린 경험들이 던지는 그 어려운 문제를 항상 인식하고 있다.
72-73p

옥스포드의 신학자인 오스틴 파러는 이렇게 자문했다. 리스본에서 발새한 지진에 대한 신의 뜻은 무엇인가? 이 끔찍한 재앙은 1755년 만성절 All Saints Day 에 발생했다. 사람으로 가득 차 있던 교회들은 전부 무너져서 5만 명이 죽었다. 이것은 가장 쓰라린 자연적 악의 예이다. 파러의 대답은 가혹했지만 사실이었다. 신의 뜻은 지각을 구성ㅇ하는 요소들이 그 본성에 맞게 작용해야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들은 그 자신의 방식대로 움직이도록 허락되었다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우리의 방식대로 존재하도록 허락받았듯이.
...
이 세상의 고통과 악은 신의 약함이나 간과함 혹은 냉담함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으느 신이 아닌 다른 것으로 존재하도록, 즉 엄격한 신의 통제에서 벗어나서 자기 자신이 되도록 허락된 창조세계가 치러야 하는 불가피한 대가이다. 그러나 고통의 미스테리는 여전히 남는다. 젊은 엄마가 불치의 병에 걸렸을 때, 그것을 어떤 끔찍한 형태의 신의 형벌이나 혹은 신의 무관심의 결과로 여겨서는 안 된다. 하지만 암이 발생할 가능성을 새로운 생명의 진화를 위한 불가피한 대가라고 말한다고 해서 이 상화의 참담함이 사라지는 것으느 아니다. 지적인 논증 하나마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심오한 문제가 남아있다.
내가 기독교인인 주된 이유 중 하나는 기독교가 가능한 한 가장 깊은 수준에서 고통의 문제를 다루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신은 자신이 만든 이상한 세계가 겪는 고통을 측은하게 내려다보는 그런 동정심 많은 구경꾼이 아니다. 우리는 창조주가 세계의 고통에 동참했다고 믿는다. 신은 단지 밖에서 그 고통을 측은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내면으로부터 그 고통을 느끼고 있다고 우리는 믿는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한 가지 의미이다.
77-78p

성경은 한 권의 책이 아니다. 그것은 도서관이다. 이 도서관 안에서 우리는온갖 종류의 글들, 시와 산문, 역사와 이야기, 법, 편지 등을 찾을 수 있다. 시를 산문처럼 읽는 것은 엄청난 실수다. 로버트 번즈가 자신의 연인이 붉디붉은 장미와 같다고 했을 때, 자신이 에나 하크네스와 사랑에 빠졌다거나, 혹은 자기 연인이 초록잎과 가시들을 갖고 있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창세기 1-2장을 신이 보증해 준 과학 교과서로 읽는다면 그것으느 엄청난 실수다. 실제로 창세기 1-2장은 그보다 훨씬 흥미롭다. 그것으느 신학적인 글이다. 그리고 그 주목적은 존재하는모든 것이 신의 의지에 의해서 (하나님이 가라사대... 있으라) 존재하게 되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문자적 해석을 주장하기 시작한 것은 단지 중세 후기에 종교개혁 시대이다. 과학이 문자적 해석을 불가능하게 만들어쓸 때, 창세기 1-2장은 다시금 적절한 신학적 역할을 하도록 해방되었다. 실제로 신은 이미 완성된 세계를 만들어 내지느느 않았다. 창조주는 그보다는 뭔가 더 현명한 방식을 사용했다. 즉, 스스로를 구현할 수 있는 세계를 만든 것이다.
80-81p

"합하면 달라진다' 는 특성을 만들어내는 새로움은 외부에서 뭔가를 첨가함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더 큰 복잡성의 결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시스템이 점점 더 복잡해질수록 완전히 새로운 특성이 생겨나는데,그 특성은 단지 부분들 자체만으로는 설명이 안된다. 매우 쉬운 예가 바로 물의 축축함 wetness이다. 한 두 개의 물 분자 자체는 축축하지 않지만, 수십억 계의 물 분자를 모아 놓으면 분자들이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물이라는 집합체의 표면에 에너지를 발생시킨다. 물리학자들은 이것을 표면장력이라고 부르는데, 이것 때문에 우리는 축축함을 경험한다.
축축함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구체적인 과정을 알아내는 것은 어렵다고 하더라도) 대략적으로 이애하는 것은 쉽다. 그것은 모든 물분자가 함께 만들어내는 집합적인 효과이다. 축축함은 에너지와 연관된 특성이다. 모든 분자는 일정한 에너지를 갖는데, 분자들을 모아두었응르 때에는 분자들이 에너지를 나눠갖는 방식이 달라질 수 있다. 분자들 사이에 에너지가 새로운 방식으로 재분배되는 것이다. 축축함이란 특성이 생기는 것은 그리 특별하지 않다.
84-85p

우리가 다루는 사안에 관련된 더 흥미롭지만 덜 알려진 양지이론의 또 다른 특성이 있다. 일단 두 개의 전자가 (혹은 다른 양자 입자의 한 쌍이) 서로 상호작용을 했다면, 그 후 아무래 멀리 분리되더라도 그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힘을소유한다. 만일 전자 하나가 여기 실험실에 남아있고, 다른 전자는 가령 달 너머러 갔다고 하자. 내가 여기서 그 남아 있는 전자에 어떤 작용을 하면 동시에 그 영향은 멀리 떨어진 그 짝에게도 미친다. 다른 말로 하며 매우 놀라운 '분리됨 속의 연대성' 이 양자세계의 구조 안에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이러한 특성을 발견한 선구자들 중의 하나였다. 그는 너무나 이상한 이 특성을 오히려 양자이론에 뭔가 오류가 있다는 증거로 믿었다 (비록 아인슈타인이 어떤 면에서 양자역학의 대부였지만, 그는 양자역학의 진전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항상 양자역학을 깎아내리려 했다).
그러나 1980년대에 프랑스인들은 매우 현명한 실험을 통해서 그 이상한 연대성이 진짜로 존재함을 보였다. (물론 그들이 전자를 달 너머로 보내진 않았다. 하지만 그 아이디어를 검증할 덜 극적인 방법을 찾아냈다.) 학계에서 과학자들은 이 효과를 'EPR 실험' 이라고 부르는데, 이 이름은 처음으로 이 실험을 한 아인슈타인과 두 명의 젊은 공동 연구자, 보리스 포돌스키와 네이튼 로즌의 이름에서 따왔다. 더 자세한 내용은 나의 책 <양자이론 : 간단한 개론>의 5장을 보라. 뭔가 매우 중요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소립자 물리학자들은 분리를 시도하지만, 물리적 실재는 저항하는 것 같다. EPR 실험은 원자의 세계를 많은 원자들로 구성된 세계로만 다룰 수는 없다는 걸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깨뜨릴 수 없는 근본적인 상호연결성이 있다. 양자 입자들은 심지어 매우 먼 거리에 있어도 서로 엮일 수 있다. 과학자들은 이 놀라운 발견이 함축하는 내용을 이해하려고 노력 중이다.
88-89p

신의 액션은 항상 숨겨져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측불가능한 과정들이 갖는 불확실성 안에 그 액션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들의 섬세한 반응성은 서로 다른 종류의 인과관계들이 결코 구별되거나 분리될 수 없음을 암시한다. "이 사건은 자연에 기인하고 저 사건은 신의 섭리에 기인한다" 고 말할 수 없다. 이런 설명은 다음과 같은 신학적 필요성을 갖는 물리세계를 적절하게 잘 반영한다고 생각된다. 그 신학적 필요성이란, 곧 신이 모든 일을다하거나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독립성을 부여한 창조계의 과정들에 인내와 사랑으로 반응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신의 섭리적 은혜와 자연의 자율성이 서로 섞여 있다는 말은 신의 활동을 믿음의 통찰로 감지할 수있을지는 몰라도, 실험으로 입증할 수 없다는 뜻이 된다.
109-110p

신과 시간의 관계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은, 마라자면 신은 모든 것을 '한번에' 전체 역사를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이다. 신은 미래를 미리 아는 것이 아니라 단지 알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신의 시야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동시에 현재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견해를 받아들이기 어려운데, 그것은 실제로 미래에 일어날 세계가 위에서 제시한 비-시각적인timeless 방식으로 짜여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떄문이다. 역사는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펼쳐지는 것이다. 우리가미래를 만드는 것이지, 미래가 우리의 도착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물론 나는 신이 미래에 대해 완전히 준비되어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자유로운 인격들이 정확히 어떤 선택을 할지, 혹은 자유로운 자연과정들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미리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112p

뉴턴 자신은 그렇게 보지 않았지만, 그의 추종자들은 물리적 세계 (주로 태양과 그 주위를 공존하는 행성들로 구성된 태양계)를 거대한 시계장치처럼 보았다. 그래서 모든 것이 시계장치여야만 했다. 사람들은 기계로서의 인간(Man the Machine)과 같은 제목의 책들을 썼다.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우리는 이미 살펴보았다. 왜냐하면 뉴턴의 세계 내부에는 시계보다는 구름이 더 많기 때문이다. 물론 사실이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먼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시계이다. 왜냐하면 섬세하게 반응적인 구름보다는 시계를 이해하기가 훨씬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계적인 세계에 대한 초기의 발견을 모든 지식에 적용하려는 유혹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20세기 후반의 생물학자들에게도 똑같은 일이 발생했다고 생각한다. 생물학은 유전학의 분자적인 기초를 밝혀내면서 위대하고 놀라운 양적 성공을 이루었다. 생물학자들은 당연히 꽤나 만족스러워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상당한 절제와 주의가 요구된다. DNA의 구조와 유전적 정보의 전달은 궁극적으로 기계적 문제다 (이것이 바로 크릭과 왓슨이 이중나선 구조라는 유명한 모델을 만들 수 있었던 이유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생명의 모든 면이 기계저긴 것은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생물학은 그저 큰 스케일의 단순하고 간단한 물리학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인간의 기본적 경험을 부정하거나 사소하게 만드는, 인간 본성에 대한 어떤 빈약한 설명도 우리는 거부해야 한다. 물론 우리는 물리적 세계의 일부이다. 그래서 반복되고 측정될 수 있는 것들을 강조하는 과학자들은 우리가 누구인지에 관해 언급할 내용을 갖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예술가들에게 주목해야 된다. 왜냐하면 세계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미적 경험은 단지 우리 뇌의 신경 배선들에 의한 감정적인 부산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단지 우연히 발생한 독특한 인가의 경험이 아니다. 오히려 에술은 실재의 본성에 대한 나름대로의 중대한 관점을 제공하는 창문이다.
93-95p

환원주의자들이 설명하는 차갑고 딱딱하고 생명없는 우주에는 이러한 경험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그들의 설명에 따르면, 음악은 단지 공기의 떨림에 불과하고, 모나리자는 화학적 구성이 알려진 페인트 조각들의 집합에 불과하다. 도덕적 의지나 종교적 암시는 단지 이기적 유전자를 통해 우리 안에 프로그램된 생존을 위한 전략에 불과할 뿐이다. 실재에 대한 이런 제한적인 관점이 말도 되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리 설명해도 지나치지 않다. 가장 심오한 것들, 인간의 삶을 가치있게 만드는 모든 것들이 가치를 잃고 폐기되며, 정당화되지 않은 과학 제구구주의에 의해 희생된다.
...
우리가 실제로 살고 있는 세계의 실재는 다층구조의 풍성함을 갖는다. 종교적 설명이 갖는 장점 중 하나는, 다양한 인간 경험의 이면에서 그 경험들을 통합하는 창조주의 의지와 본성을 봄으로써 그 풍성함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과학적 탐구는 신이 우주에 부여한 합리적 질서에 대한 통찰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창조세계를 즐거워하는 신의 기쁨에 동참하는 것이다. 우리의 도덕적 감각은 선하고 완전한 신의 뜻에 대한 직관이다. 우리의 종교적 경험은 숨겨진 신의 현존과 만나는 것이다. 이 관점은 전체적이고 만족스럽다. 그것은 진실을 담고 있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신의 창조물이다.
95-96p

공기와 같은 간단한 구조가 일초보다 훨씬 짧은 시간 동안 움직이는 현상을 다룰 때에도 말 그대로 우주적 지식이 없다면, 그 시스템의 구체적인 움직임은 결코 예측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내가 ㅁ라한 섬세한 반응성이다. 이런 시스템의 운동이 예측불가능한 이유는 주변 환경의 아주 작은 영향들로부터 이런 시스템이 결코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시스템을 다루는 과학을 혼돈이론 혹은 카오스이론 이라고 한다. 이 이름이 그렇게 바람직하지는 않은데, 왜냐하면 이 시스템들의 운동이 표면적으로는 어느 정도 무작위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질서를 드러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시스템이 다음 단계에 어떻게 될지에 대해 말할 수는 없지만, 그 다음에 일어날 가능성은 어떤 영역 안에 제한되어 있다.이 분야의 용어로 말하면, 시스템의 운동이 절대적으로 아무렇게나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기이한 끌개 strange attractor 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자세하게 설명하지는 않겠지만, 카오스 이론은 질서와 무질서가 혼합되어 있는, 즉 무질서가 질서의 구조 안에 포함되어 있는 특이한 이론이다. 우리는 혼돈의 풍성한 가장자리로 돌아왔다.
우리가 기계적이고 결정론적인 특징을 갖는 뉴턴의 법칙에서 출발했음을 기억하라. 당구공 두 개가 어떻게 부딪히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다면, 부닺힌 이후의 운동을 정확히 계산해낼 수 있다는 것이 그 법칙이다. 예측불가능성과 표면적인 무작위성은 물리 세계가 실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의(결국 알아낼 수 없는) 세부적인 내용들에 매우 섬세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생긴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은 단지 우리의 무지 때문인가? 날씨는 실제로 결정된다. 다음 달 날씨가 어떨지 예측할 수 없는 이유는 단지 아프리카 나비의 날개짓에 대해 우리가 무지하기 때문이다. 아니면 보다 흥미로운 다른 대답이 있는 걸까?
여기서 우리는 어떤 종류의 추측을 선택해야하는가의 문제에 부딪힌다. 뉴턴이 정확히 옳았다고 가정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문제는 무지의 문제가 된다. 반면, 이런 근본적인 예측불가능성은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보다 자연이 훨씬 더 미묘하고 유연함을 알려주는 신호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과학자로서 나의 본능은 후자를 선택한다.
102-104p

신의 액션은 항상 숨겨져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측불가능한 과정들이 갖는 불확실성 안에 그 액션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들의 섬세한 반응성은 서로 다른 종류의 인과 관계들이 결코 구별되거나 분리될 수 없음을 암시한다. "이 사건은 자연에 기인하고 저 사건은 신의 섭리에 기인한다" 고 말할 수 없다. 이런 설명은 다음과 같은 신학적 필요성을 갖는 물리세계를 적절하게 잘 반영한다고 생각된다. 그 신학적 필요성이란, 곧 신이 모든 일을 다 하거나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독립성을 부여한 창조계의 과정들에 인내와 사랑으로 반응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신의 섭리적 은혜와 자연의 자율성이 서로 섞여 있다는 말은 신의 활동을 믿음의 통찰로 감지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실험으로 입증할 수 없다는 뜻이 된다.
109-110p

신과 시간의 관계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은, 말하자면, 신은 모든 것을 '한번에' 전체 역사를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이다. 신은 미래를 미리 아는 것이 아니라 단지 알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신의 시야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동시에 현재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견해를 받아들이기 어려운데, 그것은 실제로 미래에 일어날 세계가 위에서 제시한 비-시간적인 timeless 방식으로 짜여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는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펼쳐지는 것이다. 우리가 미래를 만드는 것이지, 미래가 우리의 도착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물론 나는 신이 미래에 대해 완전히 준비되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자유로운 인격들이 정확히 어떤 선택을 할지, 혹은 자유로운 자연과정들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미리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과학자는 기도할 수 있다. 우리는 과학이 알려주는 모든 것을 완전히 심각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여전히 세상에는 우리와 신의 액션을 위한 공간이 남아 있다고 믿을 수 있다. 물론 이 말은 기도가 크리스마스에 하늘의 아버지가 주신 백지수표를 사용하는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기도해 준 모든 환자들이 단지 내가 원하는 대로 나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는 이유이다. 기도는 마술이 아니다. 그것은 훨씬 더 인격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과 신의상호작용이기 때문이다.
111p

기도할 때 우리는 무엇을 하는 걸까?
나는 우리가 두가지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가지는 다음과 같다. 나는 유연하고 미래에 열려 있으며, 앞으로 이루어질 세계인 물리적 세계에 대해 얘기했다. 그런데 미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리가 해야 할 작은 역할이 있다. 우리가 움직일 작은 영역도 있다. 신도 또한 세계의 미래를 초래하는일에 어떤 할당된 섭리의 영역을 갖고 있다. 기도할 때우리가 하는첫 번째 일은 우리가 활동할 영역을 드려서 신의 섭리적인 뜻에 따라 신이 활동할 영역에 비추어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사용되도록 하는 것이다. 보다 전통적인 언어로 말하면, 우리의 뜻이 하나님의 뜻과 같아지도록 드리는 것이다 .그렇게 일치가 이루어진다면, 인간과 신이 바라는 것이 서로 협력하여 불가능했던 일들이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기도는 순전히 도구적이다. 그것은 진정으로 세계를 바꾼다.
내가 종종 사용하는 일례는 과학에서 따 온 것이다. 그것은 레이저 광선의 비유이다. 레이저 광선을 레이저 광선답게 만드는 것은 물리학자들이 '통일성'이라고 부르는 독특한 특성에 기인한다. 빛은 파동으로 구성되어 있고, 통일된 빛은 모든 파동들이 위상을 갖는다. 이 때 '마루'는 모두 합쳐져서 최대의 효과를 내고, '골' 또한 모두 합쳐져서 최대의 효과를 낸다. 통일되지 않은 빛은 파동들의 단계가 맞지 않아서 마루와 골이 상쇄되어 버린다. 이처럼 기도할 때, 우리는 신과 우리의 뜻 사이에 레이저 광선과 같은통일성을 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두 가지 결론을 낳게 된다. 그 중 하나가 기도는 행위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기도는 행위의 불가결한 요소이아. 만일 피곤하게 되풀이하는 고독한 노인이 이웃에 있다면, 단지 그를위해 기도하는 것으로 내 책임이 면제되지는 않는다. 나는 그에게 가서 어린 시절의 얘기도 반복해서 들어줘야 한다. 또 다른 결론은 우리가 직관적으로 옳다고 느끼는 것이 실제로도 그렇다는 것인데, 만일 기도에 대한 위의 설명이 틀렸다면 이 점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우리는 같은 기도제목으로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느낀다. 이런 기도의 힘은 무엇인가? 더 많은 사람들이 하늘문을 두드리면 하나님의 관심을 끄는 것이 더 쉬운가? 그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더 많은 의지들의 신의 의지와 맞춰지면, 신과 인간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더 위대한 힘이 발휘된다. 이것이 간구 기도의 행위이며, 기도할 때 우리는그런 일을 하는 것이다.
기도할 때 우리가 하는 일이 하나 더 있는데, 이것을 나는 옥스포드의 철학자, 존 루카스에게서 배웠다. 기도할 때 우리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하도록 요청받는다고 그는 말한다. 우리는 자신이 세상에서 진짜 가치를 두는 것에 헌신하도록 요청받는다. 나는 이것이 분별력 있고 유익한 사고라고 생각한다. 복음서에서 장님이 예수에게 왔을 때, 예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했다. 그는 장님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그는 고침을 받기 전에 이렇게 말해야 했다. "주여 내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가 세상에서 정말로 가치를 두는 것에 우리를 헌신하도록 요청받는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신은 우리의 요청을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것이 신의 인자한 목적을 뒤집지는 않는다.
113-115p

내가 1952년에 연구 학새으로 기초 입자물리학을 시작했을 때, 과학자들은 물질이 양자, 중성자, 전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었다. 전자를 이해하기 위해서 꽤나 큰 노력이 있었고, 지금도 우리는 전자를 기본적인 입자로 여긴다. 그러나 내가 이론 물리학을 떠난 1979년에 이르자, 과학자들은 양자와 중성자 자체도 보다 더 기본적인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이 입자들이 바로 이 책의 앞부분에서 엉ㄴ급한 유명한 쿼크와 글루온이다.
아무도 쿼크를 본 적이 없으며, 과학자들은 앞으로도 쿼크를 보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쿼크는 양성자와 중성자 내부에서 너무나 강하게 서로 묶여 있어서 그 무엇도 이들을 떼어낼 수 없다. 그렇다면 나는 왜 보이지도 않는 쿼크의 존재를 믿는가? 이에 관해서는 여러분에게 들려주고 싶은 긴 이야기가 있지만, 이 책의 목적에서 벗어나니까 다음 기회에 자세히 다루도록 하자. 하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쿼크의 존재를 믿는 이유는 쿼크가 많은 직접적인 물리적 경험에 들어맞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입자들이 그룹을 형성하는 형태라든가, 전자와 같으느 입자들이 양성자나 중성자와 부딪힌 뒤에 튕겨 나오는 흥미로운 궤적 같은 것들은 꼭 어떤 단단하고 작은 구성물들이 이런 입자들 안에 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대폭발을 믿는다. 물론 대폭발이 일어났을 때, 나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목격하지도 못했다.그러나 대폭발은 오늘날 우주의 모습에 잘 들어맞는다. 은하들이 서로 멀어지고 전파 잪음(배경복사라고 한다)들이 흩어져 있는 거은 오래 전 과거에 일어났던 대폭발의 남아있는 흔적으로서 가장 잘 이해된다.
나는 또한 생물의 진화를 믿는다. 아직 해결되지 않는 퍼즐들이 있고 어떤 증거들은 꽤나 단편적이도 하며, 진화과정에 대해 생물학자들이 밝혀온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이 새로 밝혀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든 것들을 추출해 내고 작은 변화들을 누적시키는 자연선택을 포함한 진화의 역사를 통해서 생물들이 처음의 간단한 형태로부터 현재의 복잡한 형태로 변해 왔다는 것은 화석의 기록들을 보거나 다른 생물들의 유전자 구조의 관계를 봤을 때, 단연코 가장 나은 설명이다.
...
보이지 않는 신의 실재에 대해서도 나는 같은 전략을 전개하고 싶다. 신의 존재는 우리의 많은 지식과 경험에 잘 들어맞는다. 예를 들어, 물리적 세계의 질서와 비옥함, 실재의 다층적인 특징들, 예배와 희망이라는 거의 보편적인 인간의 경험, 예수그리스도라는 현상(그의 부활을 포함해서)들이 그렇다. ... 나는 양쪽 모두 매우 비슷한 사고 과정을 거친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가 과학에서 종교로 내용을 옮길 때, 어떤 괴상한 지적인 방식으로 기어를 바꾼다고 믿지않는다. 특히, 신비롭게 보증되는 의심할 나위없는 어떤 지식의 원천, 더군다나 합리적인 판단과 재고에 개방되어 있지 않은지식의 원천으로부터 종교적 믿음이 비롯되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
한 꺼풀 벗겨보면, 과학과 종교는 진리를 추구하는 지적 사촌 지간이다.
...
우리가 물리적 실재와 만나는 일이 과학인 것처럼, 종교는 우리가 신적 존재와 만나는 일이다. 과학자는 신앙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많은 과학자가 실제로 신앙을 갖고 있다). 내가 그 중에 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기쁘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발견을 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희망하며 이 책을 썼다.
139-14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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쿼크, 카오스 그리고 기독교 : 과학과 종교에 관한 질문들
원제 : Quarks, Chaos & Christianity
존 폴킹혼 저/우종학 역 | SFC(학생신앙운동) | 2009년 0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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