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글쓴이 :
앤셜리 ≪
화첩기행4는 김병종의 라틴화첩기행 개정판이다.
8년 전에 읽고, 개정판을 읽었는데... 새로 읽은 것처럼 새롭고 재미나다.
김병종 화가의 멋진 그림과 김병종 시인의 느낌있는 글을 함께 할 수 있는 책.
여행과 그림과 시를 좋아한다면, 이 책 강추...
----------------------------------------------------------------------
memo
추천의 말 (김용택 시인)
그의 글에서는 아주 자유로운 시인의 향기가 느껴진다. 그의 글은 문향이 서려 있어 아름답고도 싱그러우며, 거침이 없고도 사려가 깊으며, 끝이 없는 자유를 구가하면서도 품격이 있고, 어디까지 갈 것 같으면서도 절제의 미덕을 발휘하는 문장을 구사하여 나를 매료시킨다.
...
이 책은 '화첩기행'인 동시에 남미의 역사와 사회와 예술 기행이다. 남미를 생각하면 지금도 혁명이라는 말이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한다. 혁명이라는 말은 사람들이 가야 할 길이 있고 이루어야 할 아름다운 인간 세상이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한다. 혁명이 사라진 땅은 죽은 땅이다. 우리가 사는 자본은 부패하고 문명은 낡고 지루하다. 그 죽음의 땅에서는 예술은 장식으로 전락한다. 장식은 자본이다. 고흐의 작품이 몇천 억을 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손가락만 남고 달은 사라진다. 이 얼마나 불쌍한가.
...
사회인문학저인 폭넓은 지식과 시적인 예술적 상상력이 빚어낸 남미는 그의 손에서 더욱 풍요로운 사람의 땅으로 살아난다. 그가 그린 수많은 꽃처럼 만발하고, 물고기들처럼 물을 차고 뛰어오르고, 초원의 말처럼 남미를 치달린다.
11p,13p
음악이 인생이다
햇살이 명주이불처럼 낭창낭창할 때라면 그의 기타 소리는 마음의 주름까지 펴줄 것이다. 그러기에 라이 쿠더는 천생 사시사철 햇빛 환한 쿠바에서라야 제맛이 난다.
28p
음악이 양식이다
아무래도 저 리듬이다. 광장이나 골목 할 것 없이 환청처럼 밀려왔다 사라지곤 하는 저 타악기 마라카스의 리듬, 귀와 피부 속으로 스멀스멀 스며들어와 핏줄을 타고 흐르면서 단숨에 아드레날린이라도 주사한 듯 심장박동을 팽팽하게 당겨 일으키는 저 북소리, 아련하면서도 저릿한 그 자장 속으로 들어서면 그 누구라도 '현실의 크고 작은 결핍쯤이야, 존재란 이토록 눈부시게 아름답고 달콤한 것이거늘' 이라며 가슴속에서 간지럼처럼 퍼져오는 행복감과 충만감에 푹 잠겨버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31p
달빛 도시 아바나
차는 서툴게 찍은 목판화 같은 풍경 속으로 들어간다. 어느 방향에서건 시내로 가는 불 꺼진 길의 양옆으로는 도열한 혁명군 같은 검은 나무들이 서 있다. 가끔씩 맞은 편에서 오는 차의 불빛이 휙 스치고 지나간다. 그리고 다시 계속되는 어둠. 차가 길의 한 머리를 낚아채자 마침내 멀리 드문드문 박힌 시내의 불빛이 보인다. 그러나 불빛은 가난하고 어둠은 풍성하다. 그리고 하얗게 떠오른 달. 가난한 도시는 달빛으로 부풀어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극명한 차이 중 하나는 불빛이다. 한쪽은 엄청난 양의 조명을 토해내 밤을 지워버리고, 다른 한쪽은 어둠도 골라 디뎌야 할 판이다. 하지만 오랜 세월 밤다운 시간을 가져보지 못한 나로선 어둠에 잠긴 이 달빛 도시가 정겹고 푸근하기만 하다. 네온의 차갑고 창백한 불빛이 사라진 도시는 교교하고 적막하다. 그러나 나는 모처럼 긴 안식에 들어갈 듯하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였던가. <음예공간 예찬> 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쓰지 않았던가.
"밤이...... 너무 밝다" 고.
그는 도시가 어둠을 내몰아버리면서 영혼의 휴식도 함께 사라져버렸다고 했다. 그렇다. 에일리언의 눈처럼 푸르스름하게 불 켠 도시는 사람들의 뇌마저 환하게 밝혀버려 잠들지 못하도록 고문한다. 불 꺼진 아바나의 밤이여, 밤을 밤으로 돌려준 네 모습이여. 어둠에 섞이는 해풍이여. 소금기여. 점점이 떠오른 별들이여. 축복 있을지어다.
48-49p
혁명, 사랑이라니까
혼곤한 잠에 빠졌다가 서늘한 기운에 설핏 눈을 뜨니 이미 동쪽 하늘이 붉다. 그 보랏빛 기운은 넘실 창틀을 넘고 침대를 적신다. 망연자실, 솟아오르는 붉은 해를 바라본다. 꿈틀거리는 생물처럼 해는 사방으로 그 붉은빛을 튀기며 올라온다. 그 순간에 나는 헤밍웨이처럼 아프리카의 어느 초원에 혼자 있는 사내가 된다. 여행자의 알싸한 행복감. 타고난 역마들은 바로 이 느낌 때문에 매양 집을 나서는 것이리라.
...
한약처럼 쓴 커피에 딱딱한 빵을 적셔 먹는 이 금욕적 식탁 앞에서 나는 문득 사제처럼 나의 식탐을 회개하게 된다. '그래, 너무 혀만 섬기며 살았어. 빈약한 식탁이 축복일 수 있어. 영혼이 맑아 보이잖아.' 아닌 게 아니라 눈여겨본 바로는 쿠바 사람들의 식사는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워낙 먹을거리가 빈약해서이기도 하지만 뭐랄까 먹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오랜 물자 부족의 고통을 겪으며 단련된 습관인지도 모른다.
52, 53p
푸른 집으로 가는 길
햇빛은 투명한 기름처럼 자글자글 끓어오른다. 크레파스를 함부로 문질러놓은 듯한 색색의 단층집들. 푸른 대문, 분홍 지붕, 노란 벽... 다시 초록 대문, 하늘색 담장, 붉은 지붕, 그 색채의 덩어리들이 말을 걸어오다 못해 무어라 외치며 쫓아온다. 금욕적인 수묵화 동네에서 온 나에게 사방에서 달려드는 이 원색의 생생한 야만은 속수무책이다. 여기가 어디인가. 온갖 색을 종처럼 부리며 살았던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 그들이 태어나고 살았던 곳이 아니던가. 그들의 영지답게 코요아칸은 색채들로 소란하다.
프리다 칼로의 색은 무엇일까. 나는 바깥을 스치는 색깔들을 하나씩 살핀다. 마침내 맞닥뜨린 푸른 집. 지붕도 푸르고 벽도 푸르다. 문도 푸르고 창도 푸르다. "생의 이면이 아무래 짓빛으로 사그라져내린다 해도 내 인생의 팔레트만은 푸른색으로 채우겠어." 그 집에 한때 살았던 여주인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아 나는 푸른색들의 미세한 차이와 농도를 가늠해보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152p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181p
아스토르 피아졸라
214p
해가 지면 춤이 시작되고
라보카 거리는 우울을 용서하지 않는다. 햇빛 쏟아지는 날에는 화사한 원색의 거리가, 석양의 시간에는 거리의 탱고가 헛된 지식과 우울한 사색을 흔적ㅇ 없이 날려버린다. 내 생애 다시 탱고를 추는 식나이 있으랴만 춤을 추는 그 순간, 삶의 남루함이 비늘처럼 떨어져나가던 기억만은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228p
햇빛과 물과 바람의 노래
이 팜파스의 바람 소리를 노래로 되살려낸 인디오가 있다. 팜파스의 음유시인 아타우알파 유판키. 아르헨티나에 오면 햇살과 바람 속에서도 공기처럼 그의 노래가 묻어난다. 팜파스가 키워낸 소처럼 그는 아르헨티나의 물과 바람과 햇살이 키워낸 가객이다. 안데스 산맥의 척박한 인디오 마을에서 자라난 유판키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고, 밑바닥 삶을 체험하면서 인디오의 현실과, 슬픔, 그리고 고뇌에 눈뜨게 된다.
그는 바람이 땅에서 솟아나는 모든 소리와 인간과 자연이 내는 진실의 소리들을 보이지 않는 커다란 마법주머니에 빨아들였다가 그 주머니가 너무 무거워 그만 터져버릴 때, 하늘 가득 쏟아져내리는 것이 노래랄는 동화 같은 말을 했다. 그에게 노래하는 자는 바람의 소리를 들려주는 자였다.
233p
삶과 건축의 사이
거대한 피라미드처럼 하늘을 찌르는 대성당이 있는 이 도시에는 너무 가난하여 성모상 하난를 살 처지가 못 되는 사람들이 무리지어 사는 판자촌도 있다. 사람들은 늘 자신의 삶을 프리즘으로 하여 하나님을 해석한다.
254p
어둠 속의 예수
어둠의 자락은 첨단 건물이 늘어선 부촌이나 달동네에나 골고루 내리덮인다. 지상이 어둠 속에 엎드리는 시간이면, 산정의 예수상은 허공으로 둥실 떠오른다. 흡사 승천하는 예수의 모습이다. 밤이면 조명을 받은 예수상은 희게 빛타며, 도시 어느 곳에서나 보이는 거대한 십자가로 변한다. 그 압도적인 광경을 올려다보는데, 어디선가 수만 개의 타종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환청일까. 죄 많고 슲ㅁ 많은 세상을 향해, 비둘기처럼 고요히 내려앉는 종소리. 두려움과 염려와 수고는 이제 내려놓으라고, 달래듯 종소리가 퍼져나간다. 불빛마저 흐릿한 빈민촌이 엎드린 언덕과 골짜기마다 그렇게.
263p
수국의 밤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침대 모서리까지 밀려와 넘실대는 달빛에 좀채 잠이 오지 않는다.
276p
창세기의 풍경 속으로
이구아수 폭포. 하늘 한쪽이 무너져내리는 듯한 굉음이 먼저다. '큰 물' 을 보는 순간 아찔한 현기와 함께 내 영혼의 일부가 까마득한 저 아래로 수직낙하한다. 이름하여 '악마의 목구멍'.
...
희고 거대한 물기둥을 보고 있자니 천지가 창조되던 창세기의 풍경 속으로 들어와 있는 건 아닌가 싶다. 혼돈 속에서 물과 물이 나누어지던 시간. 게다가 물보라가 옅어지는 곳에 떠 있는 이토록 낮고도 가까운 무지개라니.
279p
----------------------------------------------------------------------
화첩기행 4 : 황홀과 색채의 덩어리, 라틴아메리카
김병종 저 | 문학동네 | 2014년 01월
|
|
number: 381/48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