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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앤셜리 ≪
내가 좋아하는 주제에, 정민 선생님의 위트있는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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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o
귀국 직전 나는 붓글씨로 작은 액자를 하나 꾸며 도서관 3층 희귀본 열람실에 선물했다.
"서책은 정수를 갖추었고
자리는 환하고 깨끗하다.
나로 하여금 오래 앉아 있게 하니
읽지 않고 무엇을 하리!"
이덕무와 김정희의 글을 조합해 재구성한 글이었다. 액자를 받아든 담당 사서의 표정이 환해지더니 바로 걸자며 그 즉시 벽에다 못을 박았다.
8p
책 주인이 바뀔 때의 표정 - 한중일의 장서인
고서에 또렷이 찍힌 장서인에는 그 책의 역사가 담겼다. 책은 돌고 돈다. 주인이 늘 바뀐다. 그래도 장서인은 남는다. 어차피 영영 자기 것이 될 수 없을 바에야 장서인은 왜 찍을까? 장서인을 찍는 것은 책의 소유권을 분명히 하고, 이 책이 천년만년 자기 집안과 인연을 같이하기를 바라서다. 물론 허망한 꿈이다.
13p
장서인을 찍는 태도
연암 박지원의 <연암집>에 실린 편지글 중에 수신인이 분명치 않은 <여인> 이란 글이 있다. 나란히 읽어본다.
"... 책은 일정한 주인이 없는 법이니 선을 즐거워하고 배우기를 좋아하는 자가 소유할 뿐이오. (...) 이로 말미암아 살피건대 법을 밝혀 후세에 드리우고 용모를 덕스럽게 하여 보여준다 해도 오히려 지키기가 어렵거늘 이제 천하의 고서를 사사로이 해서 남과 더불어 선을 쌓으려 하지 않고 교만하고 인색하게 책을 끼고 후손에게만 건네려 하니 불가하지 않겠소? 군자는 글로써 벗을 모으고 벗으로써 어짐을 보탠다고 하였소. 그대가 만약 어짊을 구한다면 1000개 상자 속에 담긴 책을 벗들과 함께 닳아 없어지게 함이 옳을 것이오. 이제 높은 다락에다 묶어두고 구구하게 후세를 위한 계책이라 여긴단 말이오?"
책을 절대로 빌려주지 않는 사람에 대한 격앙된 마음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장서인만 꽝꽝 찍어 깊이 간직해두고 저는 안 읽으면서 남도 못 읽게 하고 다만 후손 대대로 보물로 전하겠다는 새각이 대체 무슨 심보냐고 나무란 내용이다. 책은 장서인을 찍은 사람의 소유가 아니다. 읽는 사람이 주인인 물건이라 정해진 임자가 있을 수 없다.
애써 도장을 찍어놓고 더 애를 써서 오리느라 고생하느니 애초에 아예 장서인을 찍지 않거나, 찍은 뒤에는 대범하게 그대로 두어 한 권의 고서가 살아 있는 유기체로 그 생명의 내력을 이어가게 함이 백번 마땅하다. 하버드에 머무는 동안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책을 보관하는 데 급급하지 않고 어떻게든 연구에 활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는 그들의 진취적인 자세였다. 옌칭 도서관의 제임스 청 관장은 방문학자들을 모아 도서관 설명회를 하는 자리에서 필요하다면 한 사람당 1000권, 2000권도 마음껏 빌려 볼 수 있도록 해줄테니 이곳에 머무는 동안 도서관의 자료를 많이 이용해 줄 것을 당부하기까지 했다. 우리나라의 박물관이나 도서관에 소장된 고서를 보려고 하면 제약은 어찌 그리 많고 규정은 왜 이리 까다로운지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한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책 가진 행세를 해도너무 한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연구자의 공부를 도와주기는커녕 계속 발목만 붙든다. 유만주가 말한, 책을 사사롭고 저속하게 지니는 고약한 태도가 이제껏 계속되어 그런 것일까? 책은 천하가 공유하는 물건이다. 책을 소장했다고 해서 그 내용까지 전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27-29p
팔랑팔랑 호랑나비 같던 박제가의 어린 시절 모습이 이 글 속에 그대로 담겨 있다. 글의 첫 구절이 '쇄서지석'이다. 쇄서는 1년에 한두 차례 볕 좋고 바람 시원한 날 방안의 책을 모두 꺼내 바람 잘 드는 마루나 그늘에 펼쳐놓고 뽀송뽀송하게 말리는 독서인의 연중행사다.
장마철을 지나는 동안 꿉꿉한 방안에서 습기를 잔뜩 머금어 곰팡이가 피거나, 그 틈에 책벌레가 책 속에 복잡한 미로를 내면 책이 아예 못쓰게 된다. 다락방에 쌓아둔 책에는 쥐가 똥오줌을 싸놓기도 해서 냄새마저 고약하다. 이럴 때 시원한 선들바람에 책을 꺼내 마루와 마당 가득 펼치면 얼마 안 있어 바람결에 책장 넘어가는 소리가 챙챙댄다. 쇄서는 보통 초가을의 문턱인 칠석에 했다. 이렇게 책갈피 사이에 시원한 바람을 한차례 불어넣어주고 나면 눅눅하다 못해 끈적대던 한지가 파닥파닥 되살아나 책장을 넘기는 손끝에 신명이 절로 붙었다.
32-33p
고서 속의 은행잎과 운초
쓰루가야의 책에는 책에 미쳐 책 주변을 떠나지 않았던 책벌레들의 흥미로운 일화도 많이 소개되어 있다. 그중에서 특히 고서 속의 은행잎에 관한 글이 인상 깊었다. 그는 고서를 넘기다가 물기 하나 없이 바싹 마른 나뭇잎을 발견할 일에 대해 적었다. 그는 반으로 접어 실로 묶은 고서의 틈새에 숨기듯 끼워둔 잎을 발견하고는 별 생각 없이 무심코 창밖으로 내던졌다. 몇 해 뒤 그는 우연히 나가이 가후1879~1959 의 수필집 <겨울날의 파리> 속에 실린 <낙엽의 기록>이란 글을 읽다가 책갈피에 끼워진 낙엽에 대한 의문을 풀게 된다.
"고서를 사거나 건조시키고 있으면 책장 사이에 은행나뭇잎이나 나팔꽃잎이 끼워진 채로 마른 것을 볼 수 있다. 장서를사랑한 나머지 누가 언제쯤 한 일일까? 주인은 세상을 떠나고 책은 주인을 바꾸어가며 모르는 사람의 수중에 들어가고, 또 모르는 세상의 모르는 사람 손으로 건너간다. 책벌레를 막는은행나뭇잎, 나팔꽃잎은 말라서 책벌레와 함께 종이보다도 가볍게 창문 밖의 바람에 날려서 사라질 것이다."
아, 책 속의 은행잎은 책벌레를 막기 위한 조처였던 것이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그간 창밖으로 날려 보낸 낙엽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45-47p
최근 이서구가 조연귀에게 보낸 편지를 구경할 기회가 있었다. 두 사람이 쓴 편지의 필체를 보면 사제요 벗이 아니랄까봐 한 사람의 글씨처럼 비슷하다.
"나는 일찍이 조선에 세 부의 좋은 책이 있다고 생각하였소. <성학집요>와 <반계수록>, 그리고 <동의보감> 이라오. 하나는 도학을, 하나는 경제를, 하나는 사람을 살리는 처방이니 모두 유자의 일이지요. 도학은 진실로 사람의 근본이 되는 일이라 말할 것이 없소. 지금 세상은 오로지 글쓰기만 숭상해서 경제에 대해서는 우습게 아닌 의원의 기술 같은 것이야 누가 밝히겠소. 천고에 두 가지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오. 명나라 진인석은 가녀린 시인인데도 경제 공부에 몰두했고, 당나라 왕발은 경박한 재사였지만 의학의 일에 통달하였소. 내가 이 두 사람을 기이하게 여겨 아까지 않은 적이 없엇소. 이제 그대는 맑고 고요하며 명석하고 지헤로워 자질과 바탕을 갖추었소. 나이도 몹시 젊소. 만약 오로지 글쓰기에만 힘 쏟지 않고 늘 실력을 쏟아 이처럼 마음을 실답게 하고 사물을 아끼는 일에 정신을 모은다면 이 세사을 헛살았다는 탄식이 없게 될 것이오. 나 같은 사람은 나라 곡식 창고에 가득한붉은 낟알 같으니 족히 말할 것이 없소. 이 두 책을 받들어 올리면서 세 책을 섞어 뽑아드리오. 앞서 본 것이라면 되풀이해서 읽지는 마시오."
<반계수록> 과 <동의보감>을 보내 읽기를 권하면서 사장, 즉 과거 시험장에서 소용되는 글쓰기에만 몰두하지 말고 경제서와 의학서를 함께 읽어 실심애물의 공부로 식견을 넓힐 것을 권면한 편지다. 두 사람은 서로 볼만한 책을 빌려주고 받으며 학문적 대화를 이어갔다. 책을 읽다가 눈에 번적 띄는 좋은 내용이 보이면 공책에 옮겨 적어 이서구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다음 편지를 읽어보자.
86-88p
초서법, 베껴 쓰기의 위력
무엇보다 다산이 강조한 공부법은 초서다. 초서란 책을 베껴 쓰는 것을 말한다. 한 권을 통째로 베끼기도 하고, 필요한 부분만 발췌해 옮겨 적기도 했다. 때로는 주어진 편집 지침에 따라 카드 작업 하듯이 원하는 항목을 간추려내는 작업도 시켰다. 그렇게 베껴 쓴 책은 수초 또는 총서란 이름으로 묶어 정리시켰다. 다산의 손때 묻은 제자치고 자신의 이름을 앞에 내세운 총서나 수초가 없는 사람이 없다. 황상은 자기 키보다 높게 <치원총서>를 남겼고, 그 동생 황경의 <양포총서> <양포일론> 10여 책도 최근 광주 황한석 선생 소장본이 발견되었다. 이 밖에 이강회의 <유암총서>, 초의의 <초의수초>, 윤종진의 <순암총서>와 <순암수초>, 윤종심의 <춘각총서> <춘각수초> 등이 남아있다. 각종 책을 베껴 쓴 개인 총서를 남겼느냐의 여부로 다산의 제자인지 아닌지를 판별하는 근거로 삼아도 될 만큼 이 초서는 다산이 제자 강학에서 가장 역점을 두어 강조했던 공부법이었다.
최근 출판계에서 베껴 쓰기 책이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잡아 가는데 어찌 보면 초서 공부의 변형된 형태다. 교회나 성당에서 오래전부터 자리잡은 성경 베껴 쓰기도 초서 공부의 원리를 활용한 공부법이다. 통째로 한 권의 책을 베껴 써보면 피상적으로 눈으로 읽을 때와는 느낌이 확연히 다르다.
...
총서란 초서집의 다른 이름이다. 자기 말은 하나도 없고 자기가 읽은 책을 베껴 쓴 것들이다. 여기에 자신의 호를 붙이고 총서라는 이름을 붙였다. 책 묶음 정도의 의미다. 이걸 보면 이들의 관심사나 공부 방식이 그대로 나온다. 주견이 없는 아이들에게 이런 방식은 인내심도 길러주고 베껴 쓰는 과정에서 공부의 안목이 열리는 희한한 경험을 하게 해주었다.
책은 눈으로 볼 때와 손으로 쓸 때가 확연히 다르다. 손으로 또박또박 베껴 쓰면 또박또박 내 것이 된다. 눈으로 대충대충 스쳐 보는 것은 말달리며 하는 꽃구경일 뿐이다. 베껴 쓰면 쓰는 동안에 생각이 일어난다. 덮어놓고 베껴 쓰지 않고 베껴 쓸 만한 가치가 있는가를 먼저 저울질해야하니 이 과정이 또 중요하다. 베껴 쓰기는 기억의 창고에 좀더 확실하게 각인시키기 위한위력적인 방법이다. 또 베껴 쓴 증거물이 남아 끊임없이 그때의 시간으로 되돌아가게 해주는 각성 효과가 있다. 초서의 위력은 실로 막강하다.
105-109p
책과 관련된 아홉 가지 활동
이덕무는 열여덟 살 때 자신의 거처에 구서재란 이름을 붙였다. 책과 관련된 아홉 가지 활도잉 이루어지는 집이라는 뜻이다. 그 아홉 가지 활동은 바로 독서, 간서, 초서, 교서, 평서, 저서, 장서, 차서, 포서 였다. 이 글에서는 이 아홉 가지 활동에 대해 알아보겠다.
첫째는 독서다. 옛사람은 책을 어떻게 읽었을까? 입으로 읽고, 눈으로 읽고, 손으로 읽었다. 독서는 입으로 소리 내서 가락을 맞춰 읽는 것이다. 예전에는 책은 반드시 소리 내어 읽어야 하는 것으로 알았다. 동서양이 한가지로 다 그랬다. 그냥 읽는 것이 아니라 아랫배에 힘을 주고서 목청을 돋워 낭랑하게 읽었다. 서당은 종일 책 읽는 소리로 소란스러웠다. ... 소리르 내서 읽으면 좋은 점이 참 많다. 좋은 글에는 무엇보다 리듬이 살아 있다. 훌륭한 책은 내용도 좋지만 무엇보다 글의 가락이 자연스럽다. 글의 결은 소리를 내서 읽어야 비로소 느껴진다. 좋은 글을 여러 번 소리 내서 읽으면 말의 가락이 살아나서 울림이 더 깊어진다. 오늘날은 낭독의 중요성이 강조되지 않지만 좋은 글을 쓰려면 소리 내서 읽는 연습을 많이 해야 한다.
... 두번째는 간서다. 눈으로 읽는 것이다.
... 세번째는 초서다. 초라는 한자는 베낀다는 뜻이다. 책을 그냥 읽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부분을 베껴가며 손으로 읽는 것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가장 역점을 두어 강조했던 독서법이다. 초서의 방법을 제대로만 익힌다면 열흘에 100권 책도 문제없이 해치울 수 있다고 말했다.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다산초당의 제자들은 저마다 독서노트를 가지고 책을 읽었다. 이 책을 왜 읽는지 목표를 정하고, 어떤 내용을 간추릴지 미리 새각한 후 공책을 펴놓고 붓을 든 채 책을 읽었다. 이렇게 손으로 베껴 쓰면서 읽으면 읽고 나서도 내용이 오래 기억되고 생각이 명료하게 정리되어 독서의 효과가 대단히 높았다.
... 네번째는 교서를 꼽았다. 교서는 잘못된 부분은 없는지 살펴보아 교정해가며 읽는 것이다. 읽다가 궁금하거나 의문이 생기면 그냥 넘어가지 않고, 관련자료를 뒤져서 내용을 확인한다. 잘못된 부분이 나오면 이를 바로잡고 여백에 메모를 남긴다.
... 다섯번째는 평서다. 평서는 교서보다 좀더 적극적인 독서활동이다. 평서는 책을 읽고 나서 인상적인 부분이나 책 전체에 대한 감상과 평을 남기는 일이다. 책은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달라진다. 사람의 기억은 잠깐 만에 사라져버린다.그러니까 책을 읽고 나서는 읽고 난 소감을 적어둘 필요가 있다. 훗날 예전에 쓴 독후가믈 보면 당시의 내 생각을 알 수 있고, 지금의 생각과 견줘볼 수도 있다. 무엇보다 한번 익힌 것을 기억의 저장고 속에 잘 간직해두려면 이 평서 활동이 중요하다. 평서도 책 위쪽에 쓴 것은 미평이라 하고 끝에 쓴 것은 미평이라고 했다. 이덕무는 박지원의 <종북소선>이란 선집을 자신의 친필로 베낀 후 책 상단과 좌우 여백에 붉은 먹으로 평을 단 책을 남겼다. 여기 적힌 평들은 그 자체로 한 편 한 편의 훌륭한 작품이다. 이덕무가 이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그대의 장서를 내게 교서하고 평서하게 한다는 말을 듣고 너무 기뻐서 잠을 이루지 못하였소" 라고 쓴 내용이 보인다.
여섯째는 저서다. 독서가 깊어지면 남의 책을 읽는 데 그치지 않고 제 생각을 펼쳐 보이고 싶어진다. 비로소 붓을 들어 먹물에 적신 후 흰 종이 위에 자기의 생각을 적어나간다. 이제 책 읽기와 관련된 여러 활동은 사실 이 순간을 위한 준비에 불과하다. ... 이제까지는 남의 글을 읽기만 했는데 많이 읽고 자꾸 생각하다보니 나도 할 말이 생긴 것이다.
... 일곱번째는 장서를 들었다. 장서는 책을 보관한다는 뜻이다. 책을 잘 간수해서 찾기 쉽게 배열하고, 낡아서 해진 책은 새로 묶고 표지를 바꾼다. 어떤 사람은 책을 구하면 장서인부터 먼저 찍었다. ... 어떤 장서가는 자신의 장서목록을 별도의 책으로 만들기도 했다.
...여덟번째는 차서다. 차서는 남에게 책을 빌리는 것이다.
...아호법ㄴ째는 포서다. 포서는 책에 햇볕을 쬐어 말리는 일을 말한다. 보가을로 햇볕이 짱짱한 날에 옛사람들은 서재 속에서 습기를 머금어 눅눅해진 책들을 마당에 일제히 널어놓고 시원한 바람에 먼지를 털고 책을 말렸다. 한지는 질기고 오래가지만 방안이 환기가 되지 않아서 습기를 잔뜩 머금으면 곰팡이가 피고 좀벌레가 생긴다. 좀벌레는 책을 집 삼아 숨어 살면서 책을 갉아먹고 산다. 옛날 책에는 좀벌레가 갉아먹어 책 속에 복잡한 길이 난 것들이 많다. 이런 책벌레가 제일 싫어하는 것은 환한 햇볕이다. 바람이 선선하게 불고 햇살이 내리쬘 때 마당 가득 흰 종이책을 널어놓으면 햇살에 놀란 책벌레들이 한꺼번에 나와 달아난다. 축축하고 눅눅하던 책이 바짝 말라서 챙챙거리며 되살아나는 느낌도 새롭다.
112-118p
오동잎 이야기
오늘은 옌칭 도서관 선본실에 가서 인보 몇 권을 촬영했다. 일본 인보인데, 인문이 인상적인 것이 많고 새김 또한 품격이 높았다. 여기서 또 오동잎을 만났다. 도처에 오동잎 홍수다. 어째 이런 일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 걸까? 눈길을 주기 전에는 있어도 있는 것이 아니고 봐도 본 것이 아니다.
먼저 <수월재인보> 중의 한 방.
인문은 이렇다. 식물은 저마다 어울리는 대상이 있다. 하늘대는 버들가지는 바람이 제짝이고 오동잎은 달빛과 함께라야 제격이다. 잎 넓은 파초는 빗방우링 후드득거릴 때가 좋고, 매화는 가지 위에 눈이 쌓여야 운치가 있다는 얘기다.
이런 문장을 하나 골라서 그 단단한 돌 뒤에 글자를 뒤집어 배치해서 붓으로 써놓고, 칼을 들어 빈 여백을 하나하나 처리해나갈 때 마음 속에 바람이 불고 달이 뜨더니, 비가 오고 눈이 내린다. 네 계절의 풍경과 꽃나무의 정경이 그와 함께 소복소복 피어났을 것을 생각하니 내 마음이 다 흐뭇하다. 실제로 도장 주인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지 않고 좋은 구절만을 새긴 이런 도장을 한장인이라고 한다. 이런 인장이 하나쯤 찍힌 그림의 여백. 책의 빈 면을 갖고 싶다.
다시 <만회당인식>을 뒤적이니 서재 이름을 새긴 인장에 또 오동잎이 얼굴을 빼꼼 내민다. 우오루서화인!
서재 이름이 우오루다. 오동잎에 빗방울 후드득거리는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서루란 뜻이다. 오동나무는 키가 크고, 그의 서루는 높직하게 자리잡았던 것이 틀림없다. 깊은 밤 등불을 밝혀놓고 책을 읽을 때 빗방울이 창밖 오동잎을 치는 소리, 생각만 해도 정신이 시원하다. 첫 글자인 우 자에서 위쪽 두 점의 회글 옆으로 슬쩍 휘어놓자 마치 빗물이 처마 밑으로 파고들다 그 아래로 떨어지는 모습 같다. 그의 모든 책에 이 도장이 어김없이 찍혀 있었을 것이다. 우오루, 참 예쁜 이름의 서재다.
이 두 인장만 보더라도 오동잎은 달빛과 어울려 무한한 생각을 자아내고, 빗소리에 얹혀 정신을 일깨우는 각성제가 됨을 알겠다. 이렇게 오동잎과 놀다가 또 반나절이 떠내려간다.
204-207p
홍석주는 "일과는 하나도 빠뜨려서는 안 된다. 사정이 있다고 거르게 되면 일이 없을 때에도 또한 게을러지게 마련이다" 라고 말했고, 또 "한 권의 책을 다 읽을 읽을 만큼 길게 한가한 때를 기다린 뒤에야 책을 편다면 평생 가도 책을 읽을 만한 날은 없다. 비록 아주 바쁜 중에도 한 글자를 읽을 만한 틈이 생기면 한 글자라도 읽는 것이 옳다" 고 말해 바쁘다는 핑계로 책 읽지 않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우리의 일상을 부끄럽게 지적했다.
잊어버리고 하는 독서, 조금씩 습관처럼 반복하는 책 읽기는 뜻밖에 효과가 마디다. 삼시 세끼를 먹는 데 특별한 목표가 있을 수 없다. 세끼를 끼니 때마다 이유를 달고 먹지는 않는다. 먹어야 하니까 먹고, 먹는가보다 하고 먹는다. 독서도 이 경지에 이르러야 일상이 된다. 특별히 배가 고프지 않아도 때가 되면 먹는다. 규칙적으로 먹는다. 소화가 안 되면 한 끼를 건너뛰는 수가 있기는 하다. 배고프다고 한꺼번에 폭식해 버릇하면 나중에 건강을 상한다. 독서강 루이의 일상에서 멀어진 것은 세끼 밥 먹듯 독서하는 습관이 사라진 것과 무관치 않다. 무심코 책을 들던 손이 스마트폰만 찾게 되면서 우리는 생각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기계의 노예가 되어버렸다.
214-215p
재빨리 적는 질서법
주자는 <횡거선생찬>에서 "정밀하게 사색하고 힘써 실천하며, 깨달음이 있으면 재빨리 기록했다." 고 그의 인간과 학문을 평가했다.
꼼꼼히 따져 생각해보고, 힘껏 실천에 옮기는 것이야말로 중요하지만, 오늘 이 글에서 소개하려는 핵심은 바로 '묘계질서'란 표현이다. 묘계는 오묘한 깨달음을 말한다. 계에는 맺다. 맞는다. 합치하다 등의 뜻이 있다. 사람을 맞아 관계를 맺는 것은 계모임이고, 바깥 사물이 내 안으로 들어와 나와 합치되는 것은 '계합'이라고 한다. 사람 사이의 관계도 계합이 중요하고, 학문의 깨달음에도 계합의 순간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계합은 지금까지 무의미하던 사물이나 대상이 나와 새롭게 만나 스파크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오묘해서 뭐라 설명할 수가 없기에 묘계라 한다. 그 만남음 묘합무은, 즉 결합이 참으로 절묘해서 부은 가장자리가 잘 보이지 않는다. 별개의 둘이었는데 완전한 하나가 된 상태다. 이런 상태는 성석제의 소설집 제목처럼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에 왔다가 자취도 없이 사라진다. 밤새 되뇌다가 깨고 나면 하나도 생각 안 나는 꿈속 중얼거림과도 같다. 나는 이 계합이란 말이 좋아 돌아가신 청사 안광석 선생님께 부탁해 이 구절을 돌에 새기기도 했다. 지금도 글씨를 쓸 때 앞쪽에 즐겨 찍는 인장이다.
묘계를 붙들어두려면 메모 말고는 방법이 없다. 섬광 같은 깨달음이 흔적 없이 날아가기 전에 잽싸게 적는 메모가 바로 질서다. 질은 보통은 병이나 버릇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빠르다는 의미로 새긴다. 질주는 빨리 달리는 것을 말하고, 질병은 병 중에도 급성으로 오는 병에 주로 쓴다.
이 묘계질서의 정신을 평생 학문의 종지로 받들어 실천한 분이 바로 성호이익 선생이다. 그의 학문은 메모로 시작해서 메모로 끝났다. <성호사설>이 그렇고, 그 밖에 경전에 관한 저술들이 모두 사색과 메모의 집적물이다.
219-221p
공부는 제 말 하자고 하는 일이다. 평생 앵무새처럼 남의 말이나 주워 모아 그것을 공부의 보람으로 알면 슬픈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사색과 실천 없이 말만 마구 떠벌리면 망발이 된다. 요즘은 하도 개성을 두둔하는 세상이라 내실 없이 일단 튀고 보자는 식의 망동을 도처에서 만나게 된다. 참신과 해괴를 혼동하면 못쓴다. 묘계 없는 질서는 낙서요, 질서 없는 주장은 도청도설에 지나지 않음을 또 명심해야 한다.
222p
비 오는 날의 책수선
"전에 들은 얘기다. 선배 재상들이 자리에 모여 저마다 마음에 기쁨을 주는 즐거운 일에 대해 얘기하다가, '어떤 일이 가장 즐겁습디까?' 하고 물었다. 제공이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얘기했다. 어떤 사람은 시 짓고 술 마실 때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아름다운 목소리와 어여쁜 자태의 여인과 함께 있을 때라고 얘기했다. 다른 사람은 서화 감상을 꼽기도 하고, 화초를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혹은 산수간에 노닐며 사냥하는 것에 대해 논하기도 했다.
도곡 이의현이 말했다. '나도 좋아하는 게 있기는 한데 여러분이 좋아하는 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제공이 그게 뭐냐고 물었다. 공이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비오는 날 손님이 없을 때, 혼자 잘 삭은 풀로 헌책의 종이를 깁고 때우는 것을 좋아합니다.' 제공이 비웃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일찍이 전하는 말을 듣고는 나 또한 이공의 궁상맞음을 비웃었더니, 이양천이 말했다. '여보게, 자네! 망령되이 함부로 평하지 말게나. 제공이 좋아한 것은 모두 세속에서 숭상하는 것들뿐이라 귀하다 할 만한 것이 못 되네. 이공께서 책을 깁는다고 하신 것은 차분하고 고요한 취미일세. 이것으로 제공과 그대의 식견에 부족함이 있음을 알 수 있겠네그려.' 서로 함께 한차례 웃었다."
이의현 (1669~1745)의 에피소드다. 그는 이민곤과 같은 과의 사람이다. 그 또한 숙종 때 이조참의와 대사간까지 역임하고 판서직을 두루 거친 거물급 정객이었다. 그런 그의 취미는 뜻밖에도 비오는 날 문을 닫아걸고 잘 곰삭혀둔 풀로 하도 읽어 좋이가 찢어지거나 나달나달해진 책을 꺼내 종이쪽을 덧대 수선하는 일이었다.
236-237p
나의 취미생활 - 풀칠제본
내가 이 풀칠 책을 처음 본 것은 일본 긴조가쿠인 대학의 다카하신 히로미 교수에게서였다. 그는 나보다 10여 세 위인데, 오랫동안 세계18세기학회 활동을 함께 하면서 친해졌다. 내가 일본으로 몇 차례 가서 발표하고, 그도 한국에 와서 몇 번 발표했다. 일본에 있는 조선 관련 자료가 필요해 복사 부탁을 했더니 그가 이렇게 풀칠해서 제본 책자 형태로 만들어 내게 건네주었다. 그러면서 자기가 직접 제몬한 것임을 거듭 강조했다. 내가 감탄하며 어떻게 이렇게 기막히게 만들었느냐고 물었다.
건네받은 책을 가지고 와서 분석해보니, 의외로 간단했다. 예전식으로 말하면 호접장이라 해서 나비 날개처럼 펼쳐 맞붙이는 제본 방법이었다. 출판사에서 처음 판을 앉혀 견본 조판으로 몇쪽씩 만들어줄 때도 이런 방식을 스는 것을 볓 번 보았다. 처음에는 내 책도 각이 안 맞아 들쭉날쭉했다. 풀칠도 요령없이 해서 중간이 떨어지거나 비뚤어지기 일쑤였다. 이제는 내공이 쌓여 야무지고 단단하다. 이 방법을 익히고부터 인문대 지하의 복사실 주인이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자기한테 돈 주고 제본하지 않고, 풀칠만 해서 쓸데없이 여백이나 재단해달라고 부탁하는 얌체 손님이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도 나는 풀칠을 한다. 한 장 한 장 펼쳐 풀칠하며 다음 면으로 넘어가는 동안 책 한 권의 윤곽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이 좋다. 촬영이나 복사를 하면서 한 번 넘겨보고, 접지할 때 한 번 더 보고, 풀칠하면서 한 번 더 보면 책의 골격이 어느 정도 파악된다. 풀칠을 마치고 무거운 책으로 두어 시간 눌러두었다가 뽀송뽀송해진 뒤에 짱짱하진 책장을 쫙 펼치면 마른 풀 기운이 당겨지면서 기지개 켜는 소리가 난다. 이때의 기분은 더없이 개운하다. 한 손에는 붉은 먹을 찍은 붓이 메모할 지점을 놓치지 않으려고 붓방아를 찧고 있다.
244-24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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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벌레와 메모광
정민 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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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mber: 465/48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