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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앤셜리 ≪
시인 김소연이 시와 관련하여 쓴 에세이...
난 처음에 시옷의 세계라고 해서
시라는 옷(입는 옷...)을 이야기하는 줄 알았는데...
글자 시옷으로 시작하는 세계였다.
움..일부러 두가지 의미를 유도한 것일지도...
어찌하였든, 시옷(ㅅ)으로 시작하는 단어들을 글제목으로 달았지만,
실제로는 그건 핑계일뿐이고...
그녀는 그냥 자신의 삶을 시와 결부지어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거 같다.
생각보다 머리 속에 남기고 싶은 구절들이 많아서
메모가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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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o
산책
걸어주자고, 화분에 물을 흠뻑 주듯 내 육체를 위해 흠뻑 걸어주자고 야심한 밤에 길을 나섰다. 동네 친구의 늦은 퇴근 시각을 떠올리며, 그의 귀갓길 버스 정류장으로 나갔다. 밤 11시가 다 되어 그는 버스에서 내렸다. 거기서 그는 또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집으로 가야 했지만, 나는 산책을 하자고 덥석 손을 잡았다.
우리는 돌멩이를 신발로 툭툭 차듯, 실없는 얘기들을 툭툭 내던지며 두어 시간을 걸었다. 걷다가 구멍가게에 들러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서 먹기도 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안개비가 가로등에 반짝거려 무지개가 보였다. 아파트 단지와 아파트 단지 사이에는 칠기처럼 윤이 나는 적막이 가파르게 놓여 있었다. 그때 우리는 우리의 발소리를 들을 수 있었따. 어떤 땐 차박거리고 어떤 땐 퉁퉁거리는. 내리는 비에 딸려 온 먼지 냄새를, 길가의 봄꽃 냄새를 실컷 맡았다.
내가 흥얼거리며 노래를 시작하자, 친구가 따라 불렀다. 우리는 같은 것을 바라보며 같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같은 입 모양을 하고 같은 벤치에 앉아 있었다.
30p
살아온 날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 베르톨트 브레히트, <아침 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
40p
상상력 - 미지와 경계를 과학하는 마음
지금 우리 집 바깥에선 남천의 푸른 잎이 빨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잎 끝을 빨갛게 물들이는 남천을 통해서 나는 일교차가 커지고 있다는 걸 알고, 저만치서 가을이 오고 있음을 느낀다. 남천은 자기 몫의 온도가 부족할 겨울을 대비하는 것이다. 우선, 잎을 버릴 계획을 세운다. 잎을 다 버려야 아주 적은 에너지만으로도 건조하고 추운 겨울을 버텨낼 수 있기 때문이다. 잎을 버리기 위해 나무는 잎자루에 떨켜를 만든다. 떨켜는 잎이 광합성해서 만든 탄수화물과 아미노산이 줄기를 통해 이동하는 것을 막는다. 그럴 때 나뭇잎에 축적된 오도 가도 못하던 영양분이 색소변화를 일으키고 낙엽을 물들이는 것이다.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 도종환 <단풍 드는 날> 에서 -
동물이 영양분을 비축해두는 습성으로 겨울나기를 하는 것과 비교하자면, 나무의 겨울나기는 반대방향으로 진행되는 습성이 있다. 비축하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 단풍을 징표로 내세워 나무는 혹독한 시기 앞에서 자기선언을 한다. 아름다운 단풍을 통해 우리는 한 계절의 절정을 경탄하지만, 실은 나무의 비장한 결심이 낳은 징표에 대해 경탄하는 것이다. 그러니 단풍을 예찬하는 이 시는 단지 나무를 의인화한 상상력의 힘에 의해 써졌다 할 수 없다. 단풍은 어째서 푸른 잎사귀와 다른지를 두고서, 과학자는 영양분의 이동 방식을 찾아냈고, 식물학자는 떨켜라는 새로운 호명을 찾아냈고, 시인은 살아남기 위해 버린다는 것은 곧 아름다워지는 것임을 입증했다.
44-45p
상상력 - 경계
"주법은 진동의 미세한 입자를 시간 속에 끼워 넣으며 악기의 경계와 세계의 경계를 건드릴 뿐인데 이 건드림, 이 건드림이 직조해내는 무늬, 진동의 미세한 입자들이 뿜어내는 숨과 그 숨의 웅숭 그림이 천변만화해내는 세계,"
- 허수경 시집 <혼자 가는 먼 집> 뒤표지에서 -
악기는 악기의 몸과 악기 바깥의 세계 그 경계를 연주자가 건드려줄 때에 연주된다. 주법은 음이라는 미세한 입자를 흔들어 시간 속에 퍼뜨려놓는다. 입자는 흔들리며 파도처럼 공간으로 퍼져나간다. 그때 비로소 음악이 들린다. 경계에 도사린 무수한 숨결을 우리는 음악을 통해서 지각할 수가 있다. 음악이 경계의 숨결을 무늬로 그려내지 못했다면, 우리는 감지 가능한 많은 세계를 다 놓치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47p
문지방 영역
발터 벤야민은 A도 아니고 B도 아닌 이 경계를 문지방 영역이라고 표현했다. 아이가 크리스마스 양말 속에 손을 넣는 순간부터 양말 속 선물을 만지게 되는 순간까지. 먹장구름이 우리 머리 맡에 잔뜩 운집해 있는 순간에서부터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져 내리는 순간까지. 당신이 나에게 오기로 한 그날로부터 당신이 나에게 도착하게 되는 순간까지. 이 사이들. 이 짧은 시간 안에는 설렘과 긴장과 예감과 떨림이 농축돼 있다. 짧은 순간이지만 더없이 길고 긴 체험의 시간이다. 한 세계와 또 한 세계의 문지방 위에서, 기대에 대한 희망과 절망의 교차점을 통과하면서, 우리는 가장 농밀하게 흔들리는 시간을 산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화학적으로 성숙한다. 성숙에 대해 한 시인이 이렇게 말해놓았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함민복, <꽃> 에서-
48p
새기다
대학 시절엔 친구들에게 이름 지어주는 놀이를 즐겼다. 글 쓰는 친구가 새로이 한 명 생기면, 생일에 이름을 지어 도장을 파서 선물했다. 친구에게 어울리는 한자를 찾아내려고 옥편을 뒤지며 밤을 새우곤 했다. 인사동 어느 골목 도장 파는 집에서 할아버지에게 전각을 배웠다. 낙관석에 조각칼을 대고 살살 긁어내면 어느새 글자가 드러났다. 그때 지었던 이름들은 어째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지만, 멋을 내기 위해서 꼭 한 글자엔 풀 초艸가, 다른 한 글자엔 실 사絲가 부수로 들어간 글자를 골랐다. 전서체로 도장에 새겨 넣으면 모양이 났고 고와 보였다.
문자는 그 자체가 기호이자 그림이다. 그게 문자가 지닌 일차적인 매력이다. 그런데 한자는 기호보다 그림 쪽에 약간 더 치우쳐 있다. 그 점 때문에 나는 서예도 좋아하고 전각도 좋아한다. 잘하진 못하지만, 혼자서 입춘대길을 써서 해마다 현관문에 붙여놓을 정도는 된다. 벼루를 꺼내 먹을 오래 갈아 준비해놓고 화선지를 펴 문진을 올려놓은 다음, 호흡을 가다듬고 붓을 드는 느린 동작들이 좋다. 찬찬히 찬찬히 한 획 한 획을 긋는 일은 나를 사람답게 만든다. 찬찬함과 천천함 덕분에 내가 사람다워지는 느낌이 난다. 도장을 파기 위해 옥편을 뒤지는 일도, 새겨 넣을 글자의 좌우를 뒤집어 도장에 입혀보는 일도, 그런 다음 사각사각 돌을 갉아내어 글자를 새기는 일도 나를 사람이게끔 한다. 그 단순한 작업을, 그리도 천천히 해야 하기에, 나는 저절로 멍청해지고 저절로 홀가분해진다. 그런 시간은 너무도 더디고 너무도 촘촘하기 때문에 일상의 잡념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냥 나는 내가 되어 있다.
53-54p
엄마
이삿짐센터 사람들을 보내고 나서, 엄마와 나는 그릇을 주방바닥에 늘어놓았다. 싱크대에 수납하려던 참이었따. 이 그릇은 너 낳고 처음 아빠랑 서울 나들이 가서 산 거라 나한텐 정말 소중한 거다... 이 찻잔은 네가 어버이날 선물로 사준 거라... 이 냄비는 비록 색깔은 이렇게 됐어도 내가 시집올 때 가져온 거라... 그릇 하나하나마다 이야기가 피어올랐다. 마룻바닥을 빼곡히 메운 채 동그랗게 포개진 그릇들 사이에 나도 동그란 그릇처럼 쪼그려 앉아 그 얘기를 들었다. 엄마의 움푹 팬 물건을 바라보려니 허기가 졌다. 어째서 엄마가 애지중지해온 물건들은 이토론 움푹 패어 있어 무언가 채워 넣게 생긴 걸까. 채워 넣고 채워 넣는 것으로 평생을 보냈을 엄마의 하루하루가 난데없이 몰려와서, 그릇만 물끄러미 쳐다보았을 뿐인데도 허기가 포만감처럼 밀려왔다. 엄마를 무어라고 부르면 좋을까. 엄마라는 이름에 담긴 슬픔들이 국그릇 엎어지듯 쏟아졌다.
가엾은 여자. 아픈 여자. 두려운 여자. 눈물겨운 여자. 엄마라는 말은, 그 마음 발음은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발음이다. 젖 한 모금 같은 모음 하나를 입속에 담고 있다가 도라지꽃이 피듯 입술만 벌리면 내뱉을 수 있다. 사람이 세상에서 처음 배우는 말. 가장 쉬운 말. 그러나 물컹한. 거대한. 너무 따뜻해서 도리어 슬프고, 너무 무거워서 도저히 쉽지 않은 말.
처음 시를 쓰려는 이들은 대개 엄마 얘기에서 발화를 시작한다. 모성을 문장으로 집약해보려는 시도는 그러나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감정 통제가 힘들고 거리 조절이 어렵기 때문이다. 학생들과 함께 시를 공부하다 알게 된 사실이다. 엄마에 대해 시를 써놓고서도 시로 다 못한 고백이 딸에겐 너무 많다. 누구는 그 고백을 보충설명하고, 누구는 말하지 않기 위해 애를 쓴다. 말하려고 애를 쓰든 말하지 않기 위해 애를 쓰든, 자신이 써놓은 시를 놓고 울먹이지 않는 학생은 보기 드물다. 눈 밑에 흐르는 눈물을 훔쳐내고 뺨과 눈이 빨개진 채로 그들이 꼭 하고 싶었던 말은 어쨌거나 똑같다. 엄마를 닮고 싶지 않다는 것. 엄마를 연민한다고, 연민하지만 엄마처럼은 살 수 없고 살고 싶지도 않다는 것.
엄마를 이렇게 표현한 구절이 있다. '아버지의 절망이 되면서부터 무너지던' 사람. 여자는 이미 태어날 때부터 제 엄마의 슬픔이 된다. 말로 설명될 수 없는 이상한 슬픔을 모든 딸들은 태어날 때부터 부모에게 선물한다. 금 간 그릇처럼 슬픔 한 줄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장차, 한 남자의 슬픔이 된다. 그 이상한 슬픔으로 인해 한 남자의 절망에 가까워져간다. 그런 후, 자라나는 딸의 슬믚이 서서히 되어간다.
62-64p
선물이 되는 사람
현관문이 열리고 아이가 들어온다. 신발을 벗는 동시에 아이는 나를 부르기 시작한다. 나는 빨래를 개다 말고 현관문으로 걸어간다. 아이는 마루에 들어선 채로 두 팡르 벌리고 서 있다. 나도 두 팔을 벌리고 아이를 품에 안는다.
"나무 같았지요?" 두 팔을 벌린 채 서 있었다는 뜻이다. 얼마간은 기다렸지만 오래는 아니었고, 자기가 기다리는 역할을 할 수 있어서 기쁘다는 표현이다. 이렇게 안을 줄 아니까 나무보다 훨씬 멋지다고, 평소 목소리보다 서너 음계는 높인 목소리로 나는 아이를 응대한다. 아이는 이모의 맞장구를 마음에 들어한다.
"뭐 하고 있었어요? 나 기다리는 거 말고요." 실은 아이를 기다리지 않았고 다만 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할지라도, 아이가 그렇게 말해주고 규정해줌으로써 나는 아이를 기다린 사람이 된다. 아이에게 자기를 기다린 예쁜 사람으로 자격을 부여받는다. 개다 만 빨래를 보여주자, "같이 할까요?" 하며 철퍼덕 앉는다. 작은 손으로 야무지게 양말의 짝을 맞추기 시작한다. 함께 빨래를 개며 아이는 공룡의 위계질서를, 어린이집에서 오늘 겪은 일을, 여기까지 오는 동안 통학버스에서 내려 걸어서 2분 거리 동안에 보고 들은 것들을 쉴 새 없이 말한다. 죽은 개미를 보았고, 가로수의 껍질에 어떤 무늬가 있었고, 민들레가 마단에 피었고, 구름이 어쨌고, 이 놀라운 연구자의 보고를 경청하자니, 우리 집 주변은 놀라운 정보로 가득 찬 세계다. 이 놀라운 발견자의 눈을 빌려 집 앞 골목을 집 안에서 상상하자니, 나는 아름다운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동네에 살고 있다.
...
아이와 사물 사이의 높은 유대감은 집 안을 난창판으로 만들기도 한다. 치울 줄 모르는 아이의 그 이면에는 사물과 오래 이야기를 나눈 교감의 여정이 고스란히 펼쳐져 있다. 어지렵히는 것이지만 실은 펼쳐놓는 것이다. 위대한 몰입과 창조의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아이들은 골목을 걸으며 자기에게 말을 거는 사물을 너무 많이 만나서 호주머니가 불룩해지도록 주워 들고 집에 들어온다. 버려진 사물들이 건네는 말을 들어주는 교감 능력, 새로운 사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창조자의 능력. 아이에겐 그런 능력이 있따.
마당에 핀 양귀비꽃을 아이에게 보여주었다. 아이는 금세 꽃에게 바짝 다가간다. 그러다 깜짝 놀란다. "어, 이거 왜 움직여요?" 바람이 불어서 꽃이 춤을 추는 중이라고, 어른들의 상투적인 표현으로 내가 설명을 하자, 아이는 환하게 웃으며 큰 목소리로 말한다. "바람이 좋아서 이래요?" 바람이 분다는 것과 꽃이 춤춘다 사이에 좋아서 란 말이 매개가 되니 바람과 꽃에게 생기가 생기는 듯하다. 아이는 바람과 꽃을 사이좋게 매개하고선 양귀비처럼 흔들흔들 춤을 추고 있다. 내가 쳐다보며 웃자 "나도 좋아서 이래요" 라 한다. 바람 한 점과 꽃 하나의 리듬을 타고 그 순간을 마냥 즐기고만 있다.
함께 길을 걸었다. "내가 좋아요?" 뜬금없이 내게 묻는다. 어떻게 알았느냐며 빙그레 웃는 내게 아이는 비밀을 알려주듯 설명한다. "나를 자꾸 쳐다보잖아요. 자꾸 쳐다보면 좋아하는 거예요." 아이와 놀아주기 위한 시간이 아이와 데이트를 하는 시간으로 변해가고 있어따. "나도 이모를 좋아해요. 이렇게 게처럼 걷고 있잖아요." 게걸음으로 나를 보며 걷는 아이를 따라 나도 게걸음을 한다. 우리는 마주본 채 게처럼 옆으로 걸어서 산책을 한다. 우리는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 기쁘다 말하는 내게 아이는 대답한다. "그럼, 우리 친구할까요?"
73-77p
선물이 되는 시간
자문자답의 시간을 아침마다 개최합니다. ... 우선 저만치에 밀쳐둔 고백들을 소환해옵니다. 대개의 고백들은 의문문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도 될까요? 그렇게 하지 않아도 괜찮을까요? 실은 이걸 하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나요?"
...
이 자문자답의 아침 시간이 참 좋아요. 억지로 일어나 억지로 졸음을 물리치는 아침이 아니라, 숙면을 취하고 저절로 잠이 깬 푸른 새벽이 우선 내 앞에 있거든요. 푸른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지요. 오른쪽 창문에선 해가 떠오르고, 왼쪽 창문에선 달이 떠 있기 때문에, 나는 해와 달을 보려고 다섯걸음 정도를 걸어서 방을 횡단합니다. 이 1교시를, 나는 '해와 달을 보는 데에 다섯걸음의 시간'이라 부릅니다. 푸른 창문이 하얀 창문으로 바뀔 때까지, 나는 다섯 걸음을 걸어 해를 보러 가고, 또 다섯걸음을 걸어 달을 보러 갑니다. 하늘가에는 구름이 깔려 있지만, 내 시선은 언제나 구름의 시접을 비집고 나온 빛에 가닿아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영화를 안 보아도, 음악을 안 들어도, 책을 안 읽어도, 진짜 빛을 읽어내는 시간을 누리는 거예요. 그리고 자전거를 타고 바깥에 나가지요. 입 없는 신체기관처럼 광장과 길목을 구경해요. 새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어떤 나무가 새를 부르고 있는지 두리번거립니다. 쌩쌩 달리며, 간밤에 내린 이슬이 사라지기 전에 갓길의 풀들에게 안부 인사를 건네지요. 세상 모든 사물은 맑게 씻은 얼굴을 하고 있어요. 나는 자전거 안장의 높이로 거리를 바라보지요. 쌩쌩 달리면서요. 내가 만드는 바람을 나 혼자 느끼면서요. 이 2교시를 나는 '바람을 만드는 시간'이라고 불러줍니다.
자전거를 타고 하릴없이 골목을 달리는 속도감 있는 산책길은 한계가 없답니다. 직진으로 달리지 않으니까요. 구불구불 새 골목길을 발견하고 새 골목길에 새로 생긴 가게를 발견하고 골목길이 안내하는 또 다른 골목길을 발견하니까요. 3교시가 시작될즈음에 나는 집으로 돌아갑니다. 진열장에 빵을 내놓느라 부산한 빵집에 들릅니다. .... 가게 간판은 모서리가 반짝거립니다. 금화를 나누어 갖듯 햇빛을 마음껏 나눠 갖는 이 시간, 모두가 부자가 된 듯 떵떵거리는 모습입니다. 새벽이 박하 냄새가 이 집 저 집에서 아침밥을 하는 냄새로 바뀌는 시간, 자전거 안장 높이의 허공은 내가 차지합니다. 나는 쌩쌩 달립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 3교시를 맞습니다. 자문자답의 긴긴 시간을 갖기 위해, 갓 구운 흰 빵과 갓내린 까만 커피를 경전처럼 앞에 둡니다.
햇볕에 따뜻해진 돌을 손이 움켜잡듯,
하루의 처음 몇 시간 동안 의식은 세계를 움켜잡을 수 있다.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서곡> 에서-
80-83p
상하이
상하이를 뒤로하고, 미련 없이 강남 수향들을 돌아다녔다. 쑤저우와 항저우, 그리고 퉁리와 우젠, 사이사이 작은 도시들을 종횡무진 누비고 다녔다. 상하이의 위위안에서 시작하여 수향의 모든 정원들을 탐색했다. 대숲과 대숲에 부는 바랍 소리를 좋아하던 나는 그 소리가 지겨워질만큼 쏘다녔다.
88p
소리가 보인다
"내재율, 이런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이에요. 율이 어떻게 안쪽에 존재해요. 율은 형식이잖아요. 형식이 어떻게 안쪽에 존재해요. 궁색한 용어 같아요. 우리나라에 시인이 이토록 많은 건 시 쓰기가 너무 쉬워서인 거 같아요. 율을 모르는 사람이, 언어에 대한 감식안이 없는 사람이 시인인 건 시에겐 너무 불행한 일이에요. 시는 노래잖아요. 둘러보세요, 지금 노래하는 시인이 누가 있어요. 전부 이미지, 이미지. 그게 아니면 인생 이런 거야 가르치는 시. 시가 노래라는 사실을 모두가 잊어버렸나 봐."
얼마 전 어떤 분이 나에게 해준 이야기였다. 불뚝불뚝 하고 싶은 말이 올라왔지만, 입을 꾹 다물고 그저 듣기만 했다. 노래니 운율이니 하는 말들이 귓가의 모기처럼 윙윙댔다. 이 이야기를 들은 다음부터는 시집을 펼쳐 읽ㅇㄹ 때면 노래가 될 만한 작품들을 찾아내려고 애를 쓰곤 했따. 물론, 내가 시를 쓸 때도 마찬가지였다. 평소 말을 할 때에도 문어체로 말하며, 무수한 번역 책들을 읽어대어 번역 투 문장이 글만 썼다 하면 묻어 나오며, 음악은 좋아하나 문외한임, 노래를 못해서 언제나 음치 혹은 박치 소리를 듣고 살아왔지만, 나에게도 말맛을 혀끝으로 느끼는 감식안이 없는 건 아니다. 말이 그려낸 이미지를 등에 업고도 말이 지닌 뜻을 어깨에 얹고도, 말은 그 자체로 음악에 가깝다는 걸 나도 안다. 온전히 그 맛을 육체로 받아들여 음미하고 식별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나는 특히 나의 모국어가 좋다. 내 머리가 아니라 내 몸이 그 맛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 때론 짜릿하기까지 하다.
98-99p
소심 + 서투름
하고 싶은 유일한 말은
닿을 수 없는 곳에서 반짝인다.
전당포 안의
은그릇처럼.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사월과 침묵>에서-
108p
손가락으로 가리키다
"뼈에 연보라색 불이 들어오도록 음악을 종일 들었습니다."
-김경주의 시 <프리지어를 안고 있는 프랑켄슈타인>에서-
당신의 육체는 지금 불이 켜져 있나요. 당신 육체 한구석이 환하게 빛을 내는 것을 당신은 알아채고 있나요. 육체 어디에 불이 들어와 있나요. 당신의 배인가요. 심장인가요. 이마인가요. 손가락인가요. (당신은 혹시 ET가 손가락에 불을 켜고서 한 말을 기억하나요. 혹시, 기형적으로 길쭉했던 그 손가락만을 기억하나요. 불이 켜졌던 이미지만을 기억하나요. ET는 소년과 작별하며, 손가락에 불을 켜 소년의 이마에 갖다 댑니다. 그러곤 말합니다. "바로 여기에 있을게 I'll be right here.")
117p
반딧불 공원
오래 전, 쿠알라룰푸르의 외곽에 자리잡은 반딧불이 공원에 찾아간 적이 있다. 마을 전체가 가로등조차 없는 칠흑이었다. 공원 주차장에 차를 세우니, 안내원이 손전등을 들고 다가왔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기를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연신 손가락을 입술 위에 세운 채 우리에게 조용히 하라고, 아무 말도 하지 말록, 걸음 소리도 내지 말라고, 돌멩이를 밟을 때 소리가 나지 않게 천천히 걸으라고, 뒤를 돌아보며 눈빛으로 주의를 주었따. 우리 일행은 그의 단정하고 조용한 몸짓에 기가 눌려 수행자처럼 조용조용 뒤따랐다.
한 시간을 넘게 걸었다. 반딧불이 공원에 가는 중인지, 어디 이상한 데로 가는 건 아닌지 걱저잉 될 만큼 걸었을 때, 입장권을 파는 작은 나무집 한 채가 나왔다. 물론, 그 나무집에도 전등불 하나 켜 있지 않았따. 안내원이 손전등을 비춰 안내해주는 대로 우리는 입장권을 사고 줄을 서서 카누를 탔다. 지시에 따라 두 명이 한 배를 탔고 발을 배 한 가운데에 모으고 일자로 누웠다. 뱃머리에 서서 누군가 노를 저었다. 강을 따라 10여분을 흘러갔다. 반딧불이들이 나타났다. 수백 마리였을지 수천 마리였을지. 꽁무니를 환하게 밝힌 벌레가 펼치는 믿을 수 없는 군무를 보았다. 날개를 달고 날아다니는 온 계절의 별자리 같았다. 창세기부터 지금까지 별의 역사를 요약해서 보여주는 현란한 다큐멘터리 같았다.
불빛 하나 없던 공원. 안내원과 뱃사공, 나무집 한 채. 한 시간 거리에 주차장을 둔, 방문객의 편리함을 전혀 배려할 생각이 없던 그 오만한 공원이 아니었다면, 엄청난 반딧불이의 경이로운 군무를 누구도 목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공원은 칠흑을 모아두고 침묵으로 자신의 소망을 피력하는 또 다른 반딧불이였다.
118-119p
허우적거림
허우적거림은 나의 자세를 헝클고 공기를 헝클지만, 나를 넘어지지 않게 하고 공기를 고여 있지 않게 합니다. 이렇게 허우적허우적하는 표현들을 가장 따뜻하게 받아주는 우리의 마지막 장소는 어쩌면 시의 장소일 거예요. 그러므로 시의 장소에서는 질서를 꿈꾸지 말아야죠. 허우적거려야죠. 혼돈을 혼돈으로, 불안을 불안으로, 공포를 공포로 말해야죠. 그렇게 해도 되는 마지막 장소니까요.
121p
손짓들 - 1인칭
사람이 태어나 나이를 먹고 살아가는 일이란 게 1인칭을 분열하는 과정이란 사실을 알게 됐다. 1인친을 폐기하는 여정이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분열되고 폐기된 1인친들은 슬퍼하지 않았다. 안개처럼 뿌옇게 흩어져 허공에 남았다. 안개 입자처럼 골고루 골목 안 모든 것들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따. 무수히 해체된 1인칭들은 이내 흩어졌고 사라졌다. 사라짐의 시간. 그것을 나는 시로 기록했다.
126-127p
송경동 시집 <사소한 물음들에 답한>
송경동 산문집 <꿈꾸는 자 잡혀간다>
131p
비 온 뒤 하늘
비 온 뒤 맑은 하늘을 바라보는 일이 좋다. 깨끗해진 하늘 덕에 다른 날보다 더 먼 곳을 볼 수 있어서 좋다. 비가 갠 새벽에는 옥상에 올라가 깜깜한 하늘을 올려다본다. 간밤에 내린 비는 이 세상으로 오려던 것이 아니라는 짐작을 해본다. 분명, 하늘을 세척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지상으로 오는 비는 수챗구멍으로 흘러가는 남은 물 같다고 생각한다. 비는 별조차 뽀득뽀득 닦아놓았다. 북극성이 도톰해졌고, 오리온좌와 카시오페이아좌가 오롯하다. 그럴 때 이 지구별을 비관하던 태도는 바람에 쓸려 가버리고,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나는 방긋방긋 웃는다. 이런 하늘을 보면, UFO의 지국 정복설이 그럴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예쁜 것을 빼앗고 싶었으리라고 그 마음을 용납은 아니어도 이해하게 된다. 비 온 다음 날 아침. 깨끗하고 명징하고 드넓어진 하늘. 북한산과 한강까지 호방히 보여주는 하늘. 가시거리가 성큰 물러난 하늘을 바라보면 두근거린다. 살기 싫을 만해질 때면 그렇게 하늘이 나를 돕는다. 오직 푸름과 투명함으로 나의 우울을 제압한다. 그런 날은 날개 없이도 하늘을 날 수 있을 것 같다. 파랑을 뚫고 내가 짐작하고 짐작하던 너머의 세계로 갈 수 있을 것 만 같다.
136-137p
김수영의 펭이
아이들은 으레 수천 년 전의 성인과 같이 풍경을 바라보지 않는다. 스스로 풍경 속에 뛰어 들어가서 논다. 스스로 풍경의 일부가 된다. 풍경 앞에서 골똘히 바라보는 자는 언제나 날이 서 있고 피로하다.
150p
신해숙
나는 내가 되어가고
나는 나를
좋아하고 싶어지지만
이런 어색한 시간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 신해숙 <축, 생일> 에서-
226p
실루엣 그림자론
하루 중에 두 번, 낮과 밤이 교차되는 시각, 해 뜰 때와 해 질 때, 이 시간은 빛이 있되 전부 다 있지는 않다. 빛이 조심스렇게, 농도와 밀도를 조금 낮추고 낮게 포복해 있다. 적들의 시선을 피하려는 병사들처럼 포복해서 이 세상 쪽으로 기어 온다. 세상 모든 모서리들은 황금빛이 된다. 아이들의 뺨에 난 솜털과 머리카락 하나하나가 빛을 머금은 채 건널목을 지나가고, 세상의 난간 위에는 먼지가 뽀얗다.
231-232p
심보선 - 사소한 감염 하나, 이상한 금기어들
그의 시는 일차적으로 우릴 당혹케 했다. 사랑, 이별, 추억, 미련, 고독, 욕망, 수치, 체념, 불안, 전락, 진리, 혁명, 절망, 환멸, 침묵, 인생, 우울, 비극, 폐허, 존재, 슬픔, 운명, 번민, 심연 같은 낡아빠진 시어들을 시에 장착해서 중심축을 만들었기 떄문이었다. 시를 쓴다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금기어'로 낙인찍힌 낱말들. 그는 이런 금기어들을 데려다가 마치 그간의 홀대함에 대해 사과문을 작성하는 사람처럼, 애절하게 그 낱말들을 통과했다. 그리고 그 버려진 낱말들을 자기 것으로 조용히 가져갔다. 심보선은 자신이 가져다 쓴 금기어들을 자신만의 독점어로 취하지 않았따. 단지, 심보선 덕분에 이 낱말들은 금기로부터 해제됐다. 실은 시인들이 너무도 흠모하고 탐했던 저 낱말들을 불경스럽게도 심보선은 금기의 장소에서 훔쳐와 우리에게 건넨 셈이 됐다.
24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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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옷의 세계 : 조금 다른 시선, 조금 다른 생활
김소연 저 | 마음산책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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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mber: 360/48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