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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앤셜리 ≪
조선후기 문인인 이덕무가 쓴 시와 에세이를 모아놓은 책이다.
본인을 책만 보는 바보라고 일컬을 정도로 겸손한 사람인데,
실제로는 (연암)박지원, 박제가와 같은 걸출한 지식인들과 어울리며
이야기를 나눌 줄 아는 조선시대 지식인이었다.
다만 가난을 벗어나는 방법을 잘 모른다는게 흠이라면 흠.
다산 정약용 선생이 옆에 있었더라면,
실학정신으로 가난을 벗어나는 법을 알려주셨을텐데...
어찌하였든, 이 책은 이덕무의 깨끗한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시와 에세이이다.
이덕무가 162page에 가장 큰 즐거움은
"마음에 맞는 계절에, 마음에 맞는 친구를 만나, 마음에 맞는 말을 나누며, 마음에 맞는 시와 글을 읽는 일"
이라고 하는 부분이 참 마음에 든다.
나도 그런 즐거움을 누리고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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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o
술에 취해 1
내 마음 깨끗한 매미, 향기로운 귤 같으니
나머지 번다한 일 나는 잊었노라.
불로 허공 살라 본들 결국 절로 꺼질 테고
칼로 뭉르 벤다 한들 아무 흔적 없으리니.
'어리석음' 한 글자를 어찌 면하겠나마는
온갖 서적 두루 읽어 입에 올리네.
넓디넓은 천지간 초가에 살며
맑은 소리 고아하게 밤낮 연주하네.
24p
벗과 함께
불암산 서편에 놀이 지는데
술잔 속에 푸른 산이 거꾸로 떴네.
오늘밤 벗들이 드문 모임 가졌으니
날 새기 전 돌아갈 일 섭섭도 해라.
노랫소리 퉁소 소리 한데 섞여 운치 있고
못 속에 잠긴 달빛 밝다빍은 광채로다.
이웃집 부엌에서 산야채를 빌려다가
나물과 밤을 담아 사립문에 들여놓네.
44p
국화향
바위에 기대어 핀 국화
드리운 가지 시내에 노랗게 비치네.
한 움큼 물 떠서 마시니
손에도 국화 향 입에도 국화 향.
66p
겨울
매화 가지 잡으니 떨어지는 꽃이 찬데
정자에서도 뜰에서도 이리저리 서성이네
돌아오매 향로 연기 하늘하늘 피어나니
한가한 밤도 기쁘지만 한가한 이 맘 더 기쁘네
76-77p
박제가 시집에 써준 글
재선은 다른 사람을 대할 때면 늘 말이 어눌했지만 나를 대해서는 말을 참 잘하였다. 나 또한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때면 이해하지 못하는 게 많았지만 재선의 말을 들을 때는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와 같으니 재선이 나에게 말을 하지 않으려 한들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우리는 바람이 스며들고 비가 새는 퇴락한 집일지라도, 조용히 만나기를 멈추지 않았따. 등잔불을 켜 둔 채 갖가지 다양한 책을 펼쳐 놓은 뒤 마음을 터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하였다. 하늘과 땅이 왕복하는 이치라든지 삶과 죽음의 문제라든지 고금 역사의 흥망성쇠라든지 선비가 벼슬하고 물러나는 도리는 물로닝거니와, 산수와 벗 사귐의 즈러움이라든지 서화와 시문의 운치에 대해서도 거리낌 없이 논하였다. 간혹 서로 마음에 격동되는 곳을 만나면 함께 슬퍼하고 함께 기뻐하다가 시간이 조금 지나면 아무 말도 않고서 서로 마주 본 채 마냥 웃을 뿐, 우리가 왜 그렇게 했는지 그 까닭을 알 수 없었다. 비록 이와 같이 마음이 잘 통하는 사이라 하더라도, 재선의 재주라면 모를까 내가 그의 욕심 없는 마음까지 재선과 같다고는 말할 수 없을 터이다. 재선은 참으로 욕심이 적은 사람이다. 그의 시가 담박하고 소쇄한 것은 바로 그의 성품과 같았다.
105-106p
벗을 슬퍼하는 제문
부처의 깨우침 중에
'사람이 나고 죽는 건
포말이요 파초같다' 는 말이 있는데
생사란 본시 이런 것이지.
포말이 비록 사라지긴 잘하지만
그래도 새롭게 일어날 줄 알고
파초라 하는 것도 묵은 뿌리 남아 있어
다시금 무성하게 살아나는 법이거늘.
이제 그대의 포말은
한 번 꺼져 사라지면 그것으로 그만이고
지금 그대의 파초는
또다시 푸르기를 기약하기 어렵구나.
한 번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데
뒤 이을 자식도 두지를 못하여서
그대 자취 영원히 전할 수도 없게 되니
그대 인연 예서 그만 끝이란 말가@
혹시라도 자식이 있었다면야
필시 그대 얼굴을 닮았을 테니
수시로 내가 가서 얼러 주면서
그대를 떠올리며 기뻐했겠지.
그렇건만 그대는 몇 장의 묵적만을
상자 속에 남겨 둔 채 떠나갔구나.
그대를 생각하며 남긴 묵적 읽어 보니
정신이 그만 아득해지네.
나라 안부 묻는 말
방금 입에서 나온 듯하고
빽빽이 쓴 몇 행의 글씨
지금 막 그대 손에서 나온 듯하여
꼭 서로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은데
아뿔싸 그럴 수 없는 일이네.
동문의 동펴에는
5리 남짓 늘어선 채
한들거리는 단풍나무
알맞게 붉었구나 서리를 맞아.
그 아래서 술 마시며 함께 놀자고
나한테 약속하지 않았었나.
그 말 한지 한 달도 채 못 되었는데
...
152p
먹을 게 없어 책을 팔았구려
내 집에 있는 좋은 물건이라고 해 봐야 <맹자>라는 책 하나가 고작인데, 오랜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돈 2백 푼에 팔고 말았소이다.
그 돈으로 배부르게 밥을 지어 먹고는 희희낙락하며 영재에게 달려가 내 처신이 어떠냐고 한바탕 자랑했더랬지요. 영재 역시 오래도록 굶주림에 시달린 터라, 내 말을 듣고는 그 즉시 <춘추좌씨전>을 팔아 버리고선 그 남은 돈으로 술을 사 와 내게 대접하더이다. 그러니 맹자가 친히 밥을 지어 내게 먹이고 좌구명이 손수 술을 따라 내게 권한 것과 다를 게 무어 있겠습니까?
그날 영재와 나는 "우리가 이 책들을 팔지 않고 읽기만 했더라면 어찌 조금이나마 굶주림을 면할 수 있었겠나?" 라고 하면서 맹씨와 좌씨를 칭송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때 문득, 진실로 글을 읽어 부귀를 구하는 것이 요행을 바라는 얄팍한 술책일 뿐이요. 책을 팔아 잠시나마 배부르게 먹고 술이라도 사 마시는 게 도리어 솔직하고 가식 없는 행동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으니, 참으로 서글픈 일이외다. 족하는 어떻게 생각하실는지요?
* 족하 : 상대를 높여 부르는 말
156p
가장 큰 즐거움
마음에 맞는 계절에 마음에 맞는 친구를 만나 마음에 맞는 말을 나누며 마음에 맞는 시와 글을 읽는 일, 이야말로 최고의 즐거움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기회는 지극히 드문 법. 평생토록 몇 번이나 만날 수 있을는지.
162p
나의 친구
친구가 없다고 한탄할 까닭이 어디 있을까. 책과 함께 노닐면 되는 것을. 혹여 책이 없다면 저 구름이나 노을을 벗으로 삼고 혹여 구름이나 노을이 없다면 하늘을 나는 기러기에 내 마음을 의탁할 것이다. 만약 기러기도 없다면 남쪽 마을의 회화나무를 벗 삼고, 그게 아니라면 원추리 잎에 앉은 귀뚜라미를 관찬ㄹ하며 즐길 것이다. 요컨대 내가 사랑해도 시기하거나 의심하지 않는 모든 것이 나의 좋은 친구인 것이다.
164p
한사(寒士)의 겨울나기
몇 해전 겨울, 띠풀로 엮은 조그마한 집이 너무 추운 나머지 입김이 서려 성에가 되어 이불깃에서는 와삭와삭 소리가 날 정도였다. 내 비록 게이른 사람이지만 어쩔 수 없이 한밤중에 벌떡 일어나 <한서> 한 질을 이불 위에 죽 덮고서는 조금이나마 추위를 막아보려 하였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필시 진사도처럼 얼어 죽는 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어젯밤에는 집 뒤편으로 다시 매서운 바람이 불어와 등불이 몹시 흔들렸다. 한참을 생각하다가 마침내 <논어> 한 권을 뽑아 바람막이로 삼고선 변통하는 수단이 남달랐다고 나 혼자 뇌까려 보았다.
옛사람 중에 갈대꽃으로 이불을 만든 이가 있었다지만 이는 특별한 경우에 불과하며, 금과 은으로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짐승을 조각해 병풍을 만든 이도 있었다지만 이 또한 너무 사치스러워 본받을 건 못 된다. 이 모두 내가 <한서>로 이불을 만들고 <논어>로 바람막이 병풍을 삼은 것만 못한 것이리라. 나의 일이 어찌 한나라 왕장이 소가죽을 덮은 것과 두보가 말안장을 덮은 것보다 못하다 하겠느냐?
170p
내 가슴 속에는
간사한 사람의 가슴속에는 다른 사람을 해하려는 쇠창이 한섬 들어 있고, 세속에 물든 사람의 가슴 속에는 더러운 때가 한 섬 들어 있고, 고아한 선비의 가슴 속에는 맑은 얼음이 한섬 들어 있다. 강개한 선비의 가슴속은 분하고 비통해 온통 서글픈 가을빛이고, 기절한 선비의 가슴 속에는 여러 갈래로 뻗친 마음에 대나무와 돌들이 가득하다. 오직 대인만은 마음이 평탄하여 가슴 속에 아무런 물건도 없다.
177p
책을 읽어 좋은 점 네 가지
최근 들어 깨닫게 된 일이 있다. 일과로 정해 두고 책을 읽으면 네 가지 유익함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박식하고 정밀하게 된다거나 고금에 통달하게 된다거나 뜻을 지키고 재주를 키우는 데 보탬이 되는 것은 포함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내가 말하는 유익함이란 무엇인가?
약간 배고플 때 책을 읽으면 그 소리가 훨씬 낭랑해져 글에 담긴 이치를 맛보느라 배고픈 줄도 모르게 되니 이것이 첫 번째 유익함이요, 조금 추울 때 책을 읽으면 그 기운이 그 소리를 따라 몸속에 스며들면서 온몸이 활짝 퍼쳐 추위를 잊게 되니 이것이 두 번째 유익함이요, 근심과 번뇌가 있을 때 책을 읽으면 내 눈은 글자에 빠져들고 내 마음은 이치에 잠기게 되어 천만가지 온갖 상념이 일시에 사라지니 이것이 세 버째 유익함이요, 기침앓이를 할 때 책을 읽으면 기운이 통창해져 막히는 바가 없게 되어 기침 소리가 돌연 멎게 되니 이것이 네 번째 유익함이다.
만약 춥거나 덥지도 않고 배고프거나 배부르지도 않으며, 마음은 더없이 화평하고 몸은 더없이 편안한데다, 등불은 환하고 서책은 가지런하며 책상은 깨끗이 닦여 있다면, 책을 읽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하물며 고원한 뜻과 빼어난 재주를 겸비한 건장한 젊은이가 책을 읽지 않는다면 달리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나의 동지들이여, 분발하고 분발할지어다!
178-179p
말똥과 여의주
말똥구리는 스스로 말똥 굴리기를 즐겨 하여 용이 품은 여의주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여의주를 품은 용 또한 여의주를 뽐내면서 말똥구리가 말똥 굴리는 것을 비웃지 않는다.
188p
세속에 초연한 풍경
세속에 초연한 한 선생이 깊은 상중의 눈 쌓인 집에서 등촉을 밝혀 둔 채 붉은 먹으로 <주역>에 권점을 치고 있다 낡은 화로에서 피어오르는 푸른 향연은 하늘하늘 허공으로 오르면서 오색찬란한 빛깔을 띠는데 동글동글한 모양이 흡사 공과 같다.
조용히 한두 시간쯤 그 모습을 구경하다가 오묘한 이치를 깨닫고는 지그시 웃는다. 오른편으론 일제히 꽃봉오리를 떠뜨린 매화가 보이고, 왼편으론 솔바람 소리와 회화나무에 듣는 빗소리와 보글보글 차 끓는 소리가 들린다.
192p
세상의 평화란
세상의 평화란 별게 아니다.
나보다 훌륭한 사람은 존경하여 흠모하고, 나와 동일한 사람은 서로 아끼며 사귀되 함꼐 격려하고, 나만 못한 사람은 딱하게 여겨 가르쳐 준다. 이러헥 한다면 온 세상이 평화롭게 될 것이다.
193p
이덕무 <청장관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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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한 매미처럼 향기로운 귤처럼 : 이덕무 선집 우리고전 100선 09
이덕무 저/강국주 편역 | 돌베개 | 2008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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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mber: 373/483
